한국일보

역사의 아이러니

2015-08-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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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논설위원>

역사의 아이러니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선대에 의해 후대로 빚어지는 대 물림의 영향은 자자손손 이어진다. 그 영향은 가깝게 할아버지와 아버지, 나, 손자 증손에까지 대를 물린다. 조선조엔 역적이 되면 3대까지 죽임을 당했다. 역적의 씨를 살려두면 그 씨가 다시 살아나 또 반역을 시도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렇듯 선대가 잘못되면 그 후손들의 씨가 마른다. 그러나 선대가 잘 되거나 권력을 잡으면 후손들에게 가는 혜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것이 반란이었든 쿠데타였건 상관없이 승리한 자들이 누리는 그들만의 전리품인 셈이다.


한반도. 조선조가 일제에 합방된 후 극명하게 나타난 건 친일파와 나라를 되찾겠다는 독립군이었다.이에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치하에 나타난 역사의 아이러니를 짚어보고자 한다. 그것은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에 온갖 아첨을 떨어 떵떵거리고 살았던 매국노인 친일파의 후손들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광복군 후손들의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 보는 거다. 이미 70년이 지난 과거사지만 그래도 밝힐 건 밝혀야 한다.

한국일보가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는 ‘광복70년 독립운동가70년’ 편에 보면 독립운동가 신돌석장군과 친일파 문명기 후손의 연보가 나온다. 신돌석장군은 1906년부터 1908년 사이에 일본 선박 9척을 격침하고 일본군 관아를 소각하며 일본경무소를 습격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 보상금을 노린 동포에 의해 30세에 사망한다.

친일파인 문명기는 영덕군 소재 금은광을 인수하여 일본 육·해군 비행기 구입비용을 대주고 1군(郡) 비행기 1대 헌납운동을 전개하여 중추원 참의와 황도선양회 회장을 지내다 90세에 자연사한다. 그들의 후손을 보자. 신장군의 손자 재식(64)은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20평 남짓의 집이 유일한 재산으로 60여년을 살고 있다.

문명기의 손자 문태기(87)는 서울대의대, 일본유학, 연세대교수, 4선 국회의원, 대한의사협회 회장, 세계의사협회 회장, 보건사회부장관 등 고위직을 두루 섭렵했다. 극과 극의 차이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친일파의 후손 중엔 대학총장, 대법원장, 국무총리, 그룹 회장 등등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리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현재 확인 가능한 독립유공자 유족들은 6300여명에 가까운데 그 중 봉급생활자는 10% 정도이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에 해당한다. 한 마디로 그들의 삶 자체가 가난을 물려받은 독립운동가 유족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의 후손들이 받는 대가치곤 너무나 서글프다.

여기서 프랑스가 나치에 항복하여 독일의 지배를 받는 4년여 동안 나치에 붙어 빌을 먹던 사람들, 즉 친나치파들은 프랑스 해방후 어떻게 됐을까를 한 번 본다. 그들은 1944년부터 1951년까지 6,763명이 반역행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또 49,723명에게 사형다음의 중벌인 국적 박탈이 선고됐다. 그들의 후손들은 가난하게 산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선 해방 후 어떤 일이 생겼기에 친일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떵떵거리며 배불리 살아가고 있을까. 북한은 제쳐 놓고 남한 만의 일이다.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 의해 제정됐으나 친일파들의 책동과 로비로 인해 반민법은 1949년 개정안이 통과돼 1951년 폐지됐다.

친일파들을 숙청할 법이 폐지됐으니 친일파들이 처벌 받기는 커녕 그들의 독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잘 살아올 수밖에 없게 된 이유가 된다. “우리 조상님이 을사오적 중에 한 명이었음 좋겠다. 그러면 한국에서 금수저로 행복하게 살텐데.” 오죽하면 이런 글이 인터넷에 뜨겠는가.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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