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사가 본 조선인

2015-08-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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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지배하기 위한 자료를 얻고자 조선에 20년 이상 체류하고 있던 마펫, 게일, 노불, 웰치 등 미국선교사들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선교사들은 “조선인의 정신세계는 물질세계를 압도하며 그 마음속에 들어가기는 매우 힘들다”고 전제하고 “그들은 육신이 편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조선인의 바람은 정의와 해방이며 어떤 물질적인 풍요도 자유와 대치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조선인은 자유와 정의의 삶을 원한다,”고 하였다.(Chosun Mission Report, March 22, 1919)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 조상들의 소망은 자유와 해방이었던 것이다.

해방 70주년을 맞았다. 일제(日帝)의 압정(壓政) 36년을 통탄하지만 그 배나 되는 세월이 흘렀다. 해방의 기쁨은 분단의 슬픔으로 대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날 한국인의 진정한 해방은 평화통일인데 지금 같아서는 조국의 통일은 막막(漠漠)하기만 하다. 오히려 근래에 와서 남북관계는 더욱 멀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100년 전에 미국을 시찰한 프랑스의 철학자 토케빌레는 “미국의 설교 강단은 일제히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외치고 있었다. 미국은 희망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패트릭 헨리가 버지니아 의회(1775)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절규가 독립전쟁의 씨앗이 되었고 미국의 정신이 되었다. 인간해방은 미국의 건국이념이고, 이 땅에 들어온 한국 이민들이 익혀야 할 정신이다.

지난 달 폐쇄된 자동차 안에 내버려졌던 아이의 이야기가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정말 답답한 엄마이다. 무슨 볼일이 그렇게 급했기에 두 살 난 아이를 차 속에 잠근 채 자리를 비었을까? 다행히 로스앤젤리스의 한국계 경찰관 영 박 씨가 이를 발견하고 창문을 부수고 구해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차 안의 온도는 120도 정도였다고 하니 아차하면 아이가 죽을 뻔 했다. 꽉 막힌 한반도의 장래를 생각할 때 밀폐된 차에 갇힌 아이의 처지가 연상된다.

한반도(韓半島)의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악조건이 첩첩이 쌓였지만 그렇더라도 통일은 남북한이 모두 살 유일한 길이며 70년에 걸친 5,000만의 염원이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얀마의 수치 여사는 “민주주의는 경제 발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해방이 확립됨으로써 이룩된다.”고 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가 27년의 옥살이에서 풀려날 때 “내가 사는 의미는 인간의 존엄(尊嚴)과 해방을 위해서이다.”고 하였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워싱턴 대행진 때(1963) “인간의 존귀와 해방을 위한 꿈을 가진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다.”고 외쳤다. 이 모든 것이 현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고백이다.

존귀한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종이나 정권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기업주(企業主)의 생산수단이나 경제발전의 도구 이상의 귀중한 생명체이다. 조물주(造物主) 하나님의 자녀들이 핵 찌꺼기나 화학약품 찌꺼기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복지사회란 좋은 제도를 갖춘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사회이다. 예수는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마가복음 8:36)하는 위대한 인권선언을 하였다.

옛 시조 한편: <늦장마 잔칼질에 뼈만 남은 비탈길을/ 한 송이 들국화 제철 이라 꾸몄구나/ 나그네 지친 장대를 여기 꽂고 쉴까나> 억수 같은 장마에 앙상하게 핥긴 비탈길인데, 신통하게도 작은 들국화 한 송이가 자랑스럽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숭고함이 지친 나그네에게 활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대도 이 들국화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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