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의 원형질 ‘상사병’

2015-08-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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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상 (전 언론인)

2008년 9월 25일 태어난 내(피 한 방울도 안 섞인) 외손자 Elijah 때문에 나는 ‘상사병’을 앓느라 계속 신음하고 있다. 상사병(相思病)이란 주로 사춘기 때 특정 이성에 대한 연정에 사로잡혀 생기는 병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겪어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는지 태어나자마자 날 보고 빵긋 웃으며 눈을 맞춰 반색하더니 내 가슴을 제 침대 삼아 쌕쌕 잠도 잘 자곤 했다. 점점 커가면서 하는 짓마다 경이로워 내가 경탄성을 내지르며 오른 손바닥으로 내 오른 쪽 무릎을 치노라면 저도 제 오른 쪽 무릎을 제 오른 손바닥으로 내려치면서 깔깔 댄다.


말을 하기 시작한 후 두 살 때인가 제 외할머니와 내 귀에다 대고 ‘사랑해, 참말이야(I love you, true story)’라 하더니 얼마 전엔 큰 종이에다 큰 글씨로 ‘사랑해, 어떤 일이 있어도(I love you, no matter)’라고 쓰고 제 이름 싸인까지 해준다.

지난 2월 10일 3개월이나 조산해 인큐베이터에 2개월 이상 있다가 집으로 온 제 여동생 Julia를 조심스럽게 안고 ‘난 네 오빠 Elijah야. 난 널 사랑해, 언제나 항상 늘 널 사랑할 거야(I am your brother Elijah. I love you and I always will.)라며 아기 이마와 볼에 뽀뽀를 퍼붓는다. 이런 Elijah를 보고 있노라면 마냥 빨려들고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온다.

아마도 모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느끼는 공통된 감정이리라.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대로 모든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나 보고 듣고 배워 모방하게 되는 것이라지만, 그래서 모든 것이 일종의 표절이고 언어를 배워 구사한다는 것부터 표절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란, 말이 필요 없는 말 이전의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이 상사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약’이 될 수 있어서이다. 그리고 이 쓰도록 달콤한 약을 통해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며 우리 모두 다 행복해질 수 있어서이다.

한없이 끝없이 서로 ‘상(相)’ 생각할 ‘사(思)’ 앓을 ‘병(病)’을 앓다 보면 이 ‘상사병’이 어느 틈에 ‘상사약(相思藥)’이 되어 영세무궁토록 행복한 영생불멸에 이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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