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국수 안 먹어

2015-08-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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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고향을 떠나 피난민이 된 20여명 우리 식구들은 할아버지 둘째 부인 김노덕씨의 도움으로 사직동 기와집에서 살았다. 집은 좋았으나 가난하여 쌀밥을 먹지 못하고 매일 밀가루 음식을 먹었다. 식사는 늘 두 상으로 차렸다.

작은 한 상은 할아버지 혼자 드시는 것이었고 거기는 나머지 우리들이 먹지 못했던 음식이 올라가 있었다. 하얀 쌀밥(매번은 아니었지만) 생선, 감자, 때로는 쇠고기도 거기 있었다. 나머지 우리들의 커다란 상에는 거의 매일 국수, 수제비, 껄끄러운 보리밥에 김치, 그 뿐이었다. 나는 국수에 진력이 났다.

어느 날 아침, 네 살이 된 나는 할아버지 상 위에 하얀 밥과 고기가 있는 것을 보고 뒹굴기 시작했다. 높은 소리로, “나, 국수 안 먹어. 저기 할아버지 하얀 밥 먹을래, 국수 싫어. 저 밥 나 줘” 하며 소리쳤다.


나보다 20살 위인 내 젊은 어머니는 너무도 당황하고 부끄러워 내 궁둥이를 꼬집었다. 나는 더 크게 소리쳤다. “국수 안 먹어, 국수 안 먹어.” 할아버지는 성큼 나를 껴안아다 본인 밥상에 앉히고 마음대로 모두 먹게 했다.

나는 배가 불러 숨이 가쁠 때까지 흰밥을 실컷 먹었다. 모든 식구들은 다 쥐 죽은 듯 조용히 그 관경을 훔쳐봤고, 상을 거둔 즉시 어머니는 나를 밖에 있는 광에 데리고 가 볼기를 때렸다. 나는 살인이나 난 듯이, “나 살려줘요, 엄마가 나 때려요”를 고함쳤다.

할아버지는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빼앗아 껴안고 “아이고 우리 애기를, 이게 무슨 일인고. 이게 다 내 죄다, 이것이 다 내 탓이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도 울었다. 나는 영문을 몰랐지만 이 두 어른들이 나를 참 사랑하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 시절 이후 나는 국수를 입에 대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음식이 김치와 국수라고, 가난한 사람들이 할 수 없이 먹는 음식이라고, 나는 “절대로” 이 천한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이 편견은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이 입양한 남동생이 열 살쯤 되었을 때 바뀌었다. 방학 때 강원도 부모님께로 갔을 때 남동생에게 무얼 먹고 싶으냐 하면 그 애는 늘 “국수” 라고 했다. 또 어머니가 국수를 만들어주면 가장 기뻐했다. “너 국수가 정말 그렇게 맛있니?”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제일 맛있어요, 김치랑요” 라 했다. 그 때 나는 사직동 이후 처음으로 국수와 김치를 새로운 마음으로 시도했다. 과히 나쁘지 않았다. 한두 번 자꾸 먹으니까 맛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수, 이제 내가 너를 재인식하게 됐구나, 여러 해 동안 너에게 가졌던 편견을 용서해 다오. 네 탓이 아니었지. 세월이 우릴 그렀게 만들었다” 는 마음을 보냈다. 또, 매사에 “절대로” 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윤지윤(교육가/ 앤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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