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용감한 그대들

2015-07-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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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27일 뉴욕매거진 커버스토리 표지에 35명 여성이 의자에 앉아 정면을 당당하게 응시하는 흑백 사진이 게재됐다.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빌 코스비(76)에게 성폭행 당한 여성들 사진이라고 한다.

처음 사진을 본 순간, ‘ 이 여성들의 인권은 어디 갔나’ 하고 뉴욕 매거진에 대해 화가 났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기사를 보니 여성들이 6개월에 걸쳐 각각 인터뷰를 했고 얼굴과 이름을 공개할 것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줄 오른쪽 아래에는 빈 의자가 하나 놓여있는데 이는 성폭행을 당했음에도 두려움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36번째 피해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잡지는 수퍼모델 제니스 디킨슨 등 성폭행 혐의로 코스비를 고소한 피해여성 46명 중 35명의 인터뷰를 30페이지에 걸쳐 실었다.

1980~1990년대 시트콤 ‘코스비 가족’의 주인공인 코스비는 지난 수십년간 40여명의 여성들에게 진정제를 먹인 후 강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5년 법정에서 코스비른 필라 템플대 여자농구팀 코치에게 당사자 몰래 진정제를 준 사실을 인정했다. 20~80대까지의 여성들이 당한 성폭행은 평생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것이다.

‘여성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권력과 금력 앞에 무기력한 여성 인권 사건이 소셜 미디어가 발달한 이제야 공개되고 있다.

한국에선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있었다.

1986년 위장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서울대학교 휴학생 권양은 영장도 없이 부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연행 당일부터 10여일간 부천경찰서 문귀동에게 조사를 받으면서 가혹행위를 당하고 성고문을 당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악몽과 자살 충동, 수치심에 괴로워하던 피해자는 결국 다른 여성들이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끝까지 싸우자 결심하고 1986년 7월 3일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검에 고소했다.


87년 출소후 ‘권양’에서 ‘권인숙’으로 이름과 얼굴을 당당히 드러낸 그녀, 한 여성의 용감한 행동이 공권력의 횡포와 부도덕성, 인권탄압 실상을 폭로하여 제5공화국의 종말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권인숙은 1994년 미 럿거스 대학에서 여성학 석사, 2000년 클락 대학교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 2003년부터 명지대 여성학 교수로 있으며 대한민국 최초 성폭력 전문연구소 울림의 소장을 맡았다.

지금은 여성가족부 핫라인, 전국적인 성폭력 상담소 개설 등등으로 남성들은 여성 앞에서 저급한 농담을 못하게 되었고 자칫 성희롱이나 성추행으로 걸릴까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뉴욕일원 한인사회에도 성폭력 문제가 만연, 작년 4월 11일 퀸즈 보로홀 앞에서 제1회 성폭력 인식 시위가 대대적으로 열리면서 성폭력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님을 일깨웠다. 한인사회에도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숨기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신분이 불안정한 여성일수록 피해를 당하고도 신고할 생각을 못한다고 한다. 두려워말고 전문상담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법적 상담과 더불어 문제를 적극 해결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본인이 원치않는 불쾌한 일을 당했다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체면을 앞세우지 말고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자신의 인격과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며 또다른 범죄를 막는 길이다.

코스비를 고소한 피해여성 46명 사건 상당수가 1970~1980년대에 일어나 증거 불충분에 공소시효 만료로 처발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며 코스비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들이 미국 여성의 인권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것인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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