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말 농장

2015-07-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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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애(시인)

시에서 빌려주는 작은 농장에서 팔자에 없는 농사를 시작한지 두해 째다. 신기한 것은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물과 비료만 주면 자라기는 자란다는 사실이었다. 때때로 김을 매주는 것이 힘든데, 땅이 좋은지 잡초가 너무 무성하고 뿌리가 질겨서 한참 뽑다보면 땀이 비 오듯 하고 다음날은 어깨 허벅지가 다 아프다. 그러나 몸살 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땀 흘리고 나면 몸과 마음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노각 오이를 따서 노각 무침해먹기도 하고 그냥 씻어서 먹기도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적상추는 고기와 같이 싸먹고 자소엽(자주색 깻잎)은 말려서 발모 팩을 만들어 보려 한다. 발모 팩은 담금주(소주 보드카 1:1) 1.5 리터에 어성초, 자소엽, 녹차 말린 것( 20그램:10그램:10그램)을 유리병에 넣고 뚜껑엔 작은 구멍 몇 개 뚫어 놓으면 된다. 그리고는 3개월 후 개봉해서 샴푸 대신 두피에 뿌리고 마사지하라고 지인이 알려주어 시도해 보는 것이다.


새로 나올 머리가 잡초처럼 무성하고 뿌리도 단단하길 바라면서, 쓸데없는 잡초는 잘만 크는데 왜 정작 중요한 채소나 머리는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나 잠깐 생각에 잠겨본다. 처음 심어본 파랑 피망은 아삭거리고 맛도 좋은데 노랑 피망은 달지도 않고 심심한 것이 빈혈에 걸린 얼굴색처럼 창백한 노란 색을 띠고 있다.
생명력이 강한 토마토는 줄기마다 주렁주렁 달려서 붉으스레 익어간다. 열매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더 튼튼한 막대기로 지탱해주어야 할 것 같다. 매운 고추는 벌써 꽃을 피운다. 어려서 많이 먹던 고춧잎 무침이 그리워서 고춧잎을 좀 따왔다.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날 큰 고목나무 밑에서 소나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이웃 아저씨의 도라지꽃들을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노라니 행복이란 바로 이런 순간을 말하는 것이겠구나 싶었다. 부자가 된 듯 마음이 풍요로워지면서 보라색 흰색의 도라지꽃들이 도란도란 말을 걸어오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친구가 준 봉숭아 씨는 향기로운 꽃을 달고, 여름내 손톱을 물들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 준다. 비료는 닭똥으로만 두어 번 주었는데도 이렇게 잘 자라주니 고맙고 기특한 생명들이다. 한번 시작한 이상 어설프지만 계속하고 싶고, 봄부터 가을까지의 또 하나의 취미생활이자 게으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아닌가 싶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해바라기가 울타리처럼 자라고 있는 이 밭은 요즘 유행하는 힐링 캠프가 되어줄 것 같아 가슴 설렌다. 해바라기 꽃이 피면 꺾어서 유화로 그릴 참이다. 그래서 지인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게 이 여름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나의 바람이다.

행복은 징검다리 같은 순간이지만, 주말마다 그 징검다리를 밟고 이 여름을 건너가니 그래도 살만하다. 이 여름의 기억을 화폭에 담으며 나는 다가올 또 한 시절을 건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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