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955년도 이화여중 입학시험

2015-07-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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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사변 후 서울에 돌아온 시민들은 점차적으로 체계가 잡히기 시작을 하였다 그때 과외도 시작이 되어서 6학년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집에 모여서 과외를 했다. 그 당시는 이화여중에 입학원서를 제출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동네에서 큰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동네사람들도 자기 자식이 아니어도 그 아이가 꼭 합격되기를 친부모처럼 마음 졸이며 합격을 바랐었다

시험 보는 날, 시험용지를 받았을 때 모두들 놀랐었다. 그 이유는 질문이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시험지에 노란 색과 초록색 종이가 붙여 있었는데, 이 두 색을 합치면 무슨 색이냐는 것이었다. 2) 여러 돌멩이 중에서 차돌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3) 여러 종류의 꽃씨에서 분꽃, 채송화, 해바라기, 나팔꽃씨 등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때 벌써 이화는 시청각 교육을 시작 하였다. 3:1의 경쟁으로 치러진 입학시험에서 다섯 시간동안 필기시험을 본 여학생들은 모두 한없이 천진난만하고 명랑하며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후 면접시험의 모습은 문을 열고 면접실로 들어가면 선생님들이 앉아계셔서 묻는 질문에 답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학생이 들어올 때마다 선생님들은 주의 깊게 보시고 의자에 앉으면 이 것 저 것 물으셨는데 이때의 분위기는 매우 친밀감 있고 따뜻했다.
1886년 이런 과정을 거쳐 한 아이가 처음 학교에 입학하면 얼마나 귀한 학생이었던가! 1955년 300여명의 학생을 입학시키면서도 학교 당국은 한 아이 한 아이를 참으로 귀하게 맞이하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단 한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화이기에, 그 한 학생이 너무나 귀하기에 이화의 영문 이름은 지금까지 복수가 아닌 단수로 ‘EWHA GIRL`s HIGH SCHOOL’로 표기된다.

이화의 교육은 주입식으로 귀로 들어서 아는 것만이 아니라 보고, 듣고, 깨닫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으며,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에 옮겨지고 그 행동이 여러 사람이 볼 때 흠 없고 아름답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남에게 가르쳐 ‘여성지도자’를 키움에 ‘한국여성이 한국여성을 교육 할 수 있게’로 목표를 삼았던 이화학당 창설자 Mrs. 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선교사의 사상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이화인은 한 개인으로, 한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또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포용성 있는 자세로 상대방의 독특함을 인정하며 조화 있는 삶을 살므로 서 가정과 사회 각계에서 좋은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50년 전 입학시험에 4명이 시험을 봤으나 그중 성적이 제일 모자라던 내가 시험번호 694번으로 합격이 되어 그 이화의 독특한 교육을 통해 ‘졸업 후 개발된 아이’ 라는 별명을 얻게 된 기쁨을 누리고 있다.

졸업생 450명중 약180명이 현재 북미주에 거주하고 있는데 나의 동기는 뉴욕, 뉴저지, 커네티컷 거주자 약30명 중 1960년도 초반부터 미국에 왔거나, 또 최근에 이민 온 동창도 있다. 그 옛날 청순하였던 소녀들이 지금 70고개가 넘어 이국땅에서 격월로 만나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55년 전으로 돌아가 모두들 기쁨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김수자/여고 동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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