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인 수첩 일부

2015-07-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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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이 글제를 쓰면서, 왕년의 로맨틱한 영화 ‘무도회의 수첩’을 연상하였다. 그러나 정작 뚜렷한 동기는 한국 내에서 벌인 서정주 시인의 100주년 탄생 기념 축하 행사이다. 그 분과는 대학에서 시문학을 청강하는 교수와 학생 관계에 머물렀던 일이 유감이다. 그때가 바로 필자의 미국 유학 준비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한 때 비슷한 시기에 두 분 문인을 만났다. 한분은 담임한 반의 학부모인 강소천 아동 문학가였다. 당시 그 분의 병세가 악화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더불어 암담한 나날을 보냈다. 지금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 분의 따님 남향자매를 만나 강소천 선생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와 비슷한 시절 박목월 시인과 함께 근무학교의 문예반을 지도하였다. 어린이들을 더 잘 알고 싶다는 그 분의 바람 때문이었다. 그 분은 어린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무척 즐기셨다.

하루는 ‘저 애가 박두진 시인의 아드님’이라는 필자의 말을 듣고 바로 지갑을 꺼내셨다. “박 선생님, 여기 있는 어린이 전부에게도 주실 거지요?” 필자의 말뜻을 아신 선생님은 웃으며 지갑을 도로 넣으셨다. 강소천, 박목월 두 분을 만나 뵐 때마다 그 분들의 작품처럼 맑고 투명한 시냇물을 연상하였다.

하루는 소설가 안수길, 최정희 두 분께서 만나보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놀랐다. 그래서 달려갔다. 대중식당보다 좀 나을까 말까하는 장소에 모셨으니... 미안하다. 두 분은 “어떤 종류의 글이나 다 쓸 수 있다는 실험연구보다는, 어느 한 가지 영역의 글쓰기에 권위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역설하셨다.

그 무렵 필자는 내가 소설은 못 쓸까, 내가 시나 동화는 못 쓸까 하는 마음이었는지 여기저기에 응모하였고, 그 결과에 우쭐했던 나날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었다. 부끄러웠다. 그 이후 두 분께 감사하면서 당일의 결심을 지키고 있다.

특별히 필자의 글을 즐기신 안수길 선생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신 일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최정희 문인의 따님 김아란 소설가와는 뉴욕에서 각별하게 지냈는데, 그녀 역시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버렸다.

피천득 교수님과는 오랜 시일에 걸친 교분으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지만, 필자의 저서 ‘생각하는 나무’에 그 분이 작고하셨음을 애석히 느껴서 ‘삼년 모자랍니다’의 제목으로 자세히 썼기 때문에 생략한다. 피 교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 그리고 작고 연약한 아름다움’의 소중함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셨다.

윤석중 아동 문학가는 필자의 일생을 과분하게 장식하신 분이다. 뜻밖의 소파 방정환님의 제29회 소파상을 주셨고, 새싹회의 아동문학상을 주셨다. 윤석중 선생님 자신이 한국 어린이들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신 분이시면서, 이 방면의 일을 한 사람들에게 큰 영광을 안기셨다. 그 분이 몇 차례 필자가 관계하는 학교를 이런 일 저런 일로 방문하신 일이 있다. 강연도 하셨고, 동요.동시 전시회도 여셨다.


필자는 김향안 수필가를 존경했다. 이 분이 쓰시는 글의 지적인 향기를 즐겼기 때문이다. 하루는 브로드웨이 70가 부근의 그 댁을 방문하였을 때, 필자가 좋아하는 1977년 발행 ‘까페와 참종이’ 수필집을 주셔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 분의 글은 지적이면서 커피향기를 뿜어낸다. 특히 남편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곁들인 수필집은 하나의 예술품이다.

삶이란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이 만남의 소중함은 삶의 풍요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필자가 글쓰기를 즐기게 된 까닭은 생활 주변에 글 쓰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분들은 때때로 필자의 글에 대한 느낌을 알려주었다. 어떤 글이나 자양분을 얻으면서 자란다. 정다운 흙, 따뜻한 햇볕, 촉촉한 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귀중한 영양소를 주위에 있는 사람을 통하여 흡수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이 귀한 재산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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