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분단 민족의 한’ 주류사회 알려요

2015-05-1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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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세 앞둔 원덕중 목사, 영어 자서전 ‘3일의 여행’ 출간 화제

▶ 1990년 평양 방문 이산가족 상봉 후유증과 목사 없는 교회 보고 충격... 뒤늦게 신학교 입학, 주류 교회서 10년 목회

‘분단 민족의 한’ 주류사회 알려요

원덕중 목사(왼쪽부터)가 사돈, 원인숙 사모, 장녀 에이미, 사위 아담과 찍은 가족사진.

# 한 노인이 언덕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첫째 아들이 이름 모를 질병에 걸려 죽고 곧이어 셋째 아들도 같은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멀리 떨어진 무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서양인 부부가 나타났다. "할아버지 걱정 마시고 이 책을 읽어 보세요.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선교사인 서양인부부는 요한복음을 한자로 적은 소책자를 건넸다. 노인은 그길로 되돌아 와밤을 새며 책을 읽었다. 볼수록 빠져들었다. 몇 달 후 장터에서 선교사를 발견한 노인은 집으로 초대해 며칠을 묵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땅에 예배당을 지었고 자손들은 대대로 그리스도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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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중 목사의 조부는 1896년 평안남도 장상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났다. 원 목사는 당시 살아난 셋째 아들 원용율의 아들이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1.4후퇴 때 초등학생이던 원 목사는 큰 누나가 살던 대전으로 피난했다. 유엔군은 다시 반격할 것이라며 3일간만 대피하라고 권고했다. 집에 머문 어머니는 다음날 떠나겠다며 아들을 먼저보냈다. 하지만 3일은 65년이 됐다.


북에 떨어진 어머니는 끝내 다시 볼 수 없었다.

원 목사는 얼마 전 책을 펴냈다.

영어로 쓴 ‘3일의 여행’이다. 여든살을 바라보는 한인 1세가 영어로 책을 쓴다는 게 얼마나 지난한 과정인지는 쉽게 상상이 간다. 원 목사는 커뮤니티 칼리지의 창작 강좌를 수강하면서 2년에 걸쳐 원고를 쌓아갔다.

“매달 작문 리포트를 내야 하는데 피난시절 생이별한 이야기를 써냈더니 교수님이 충격을 받았나 봐요. 이런 글은 책으로 내야 한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사는 첫째 딸 에이미는 영어 원고를 원어민의 눈으로 점검해 줬고요. 미국인 이웃과 출판사도 지속적으로 용기를 불어 넣어줬습니다”

원 목사는 지난 1965년 유학생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가난과 언어, 문화적 갈등을 극복하며 농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을 만류하는 친지들의 설득에 세계 굴지의 건축회사인 벡텔에 취직했다. 부인 원인숙씨와 자녀를 낳으며 안정된 미국생활을 이어갔다. 동료와 단돈 2,000달러를 갖고 세운 컨설팅회사는 일년 만에 수백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그의 인생이 예상치 못한 파도를 만난 건 1990년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다. 북한의 어머니 묘소를 돌아보고 세 명의 누이들과 극적인 상봉을 했지만 후유증이 심각했다. 워싱턴DC의 회사 CEO였지만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우울증에 걸린 그를 상담한 카운슬러는 “맺힌 응어리가 있다”고 진단했다. 한 개인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분단 민족의 한이 분출되면서 영육을 강타한 것이다.

“귀에 한 문장이 계속 들렸어요.


영어였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니?’ 휴식을 취하러 웨스트버지니아에 캠핑을 갔다가 시골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없는 거예요. 그때 처음 알았죠. 미국교회에 목회자가 절대 부족하다는걸요. ‘이게 내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CEO 자리를 후배에게 넘겨주고 연합감리교(UMC) 신학교에 진학했다. 10년 동안 뉴욕주의 주류교회에서 목회에 전념했다. 많을 때는주일에 무려 4개 교회를 돌며 예배를 인도했다. 은퇴 후 남가주에 정착한 원 목사는 모든 여정을 책에담았다.

“아무도 안 읽는다고 해도 내 손자·손녀들이 꼭 이 책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가족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민자의 고난과 극복 그리고 그 와중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2세, 3세에게 전해주고 싶어요. 주류사회에도 알려야 하고요. 제 처도 8월에 영어로 자서전을 냅니다. 기록을 남기려는 겁니다”

원 목사 부부가 노구를 담금질하면서 구태여 어렵게 영어로 책을 집필하는 이유다.

<유정원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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