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이힐 신고 싶어

2014-02-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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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뉴욕 날씨 요즘 고약한 것을 다들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폭설이 내리고 쌓인 눈이 낮 동안 녹아내리거나 아침이면 얼어붙어 걸어 다니는 게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2일 열린 스태튼 아일랜드 행사에서 ‘봄의 전령사’ 그라운드 호그는 왜 제 그림자를 보았는 지, 이 겨울이 6주간이나 더 길어진다고 예고하고 있다.폭설에 묻힌 차를 빼낼 엄두를 못 내고 버스를 타고 출퇴근 하고 있는데 추위를 피해 사람들은 털모자, 목도리, 장화에 옷차림은 북극곰처럼 둥둥하니 부피가 커져 눈밭에서 굴러가게 생겼다. 3일 새벽부터 퍼붓는 눈 속에 버스를 탔는데 바로 앞자리에 앉은 타인종 중년남성의 발이 눈에 띄어보니 운동화를 신은 양쪽 발목 위를 비닐봉지로 묶고 있었다. ‘신발 위에 비닐봉지를 씌워 이 겨울 진창길 눈밭을 다닌다?’


요즘 웬만큼 사는 집 옷장에는 일년이 지나도록 안입는 옷이 쌓여있고 신발이라면 전 필리핀 퍼스트레이디 이멜다의 신발장만큼은 안되더라도 수십켤레의 구두, 운동화, 부츠, 슬리퍼 등이 잘 신지도 않으면서 굴러다니지 않는가. 안보는 척 눈길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데 그 남자는 맨하탄 방향 F전철역에서 내렸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고 전철을 타기까지 물기 젖은 바닥에 미끄러지지 말아야 할텐데’하고 내심 걱정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이 차마 눈뜨고 못 볼 풍경을 본인이 체험했다. 홍수가 난 도로를 건너자면 긴 장화가 제격인데 그날따라 몇 년 전 뒷굽을 갈아놓고 신지 않은 부츠가 눈에 보였다. 꽤 돈을 주고 산 부츠라 굽도 수십달러를 주고 갈아놓은 터였다. ‘이런 날, 신어주어야지’ 하고 밖을 나왔다. 쌓인 길가의 눈과 고인 물이 엄청나도 성큼성큼 발을 디뎌 버스정류장에 서고 보니 오른발이 살짝 젖었다. 직장에 와서 부츠를 벗고 보니 오른쪽 신발 볼 사이가 살짝 갈라져 있다. 집으로 갈 길이 대략난감, 옷이건 마음이건 젖는 것은 별로다. 그래서 슬픔이란 감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 날 본 그 아저씨를 떠올리면서 궁상스럽지만 비닐봉지를 구해 오른쪽 양말 위에 씌워 발목을 묶은 뒤 부츠를 신어야 했다. 그날 저녁 바로 부츠를 버렸지만, 그 남자는 젖은 운동화를 그 다음날도 신고 일하러 갔을까? 이렇게 부츠와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보니 햇빛 좋은 날, 말짱한 도로 위로 하이힐 신고 걷는 꿈을 꾸지 않을 수 없다.

지난달에 TV를 보다가 영국 유명배우 에마 톰슨이 하이힐을 뒤로 던지는 장면을 보았었다. 제71회 골든글로브 최우수각본상을 시상하러 온 그녀는 상의부분이 금색으로 된 검정 드레스를 잘 차려입고 굽이 15센티미터 된 명품 하이힐을 손에 들고 맨발로 레드 카펫을 걸어오더니 마이크 앞에 서자 구두를 무대 뒤로 집어던졌다.

하이힐의 위험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퍼포먼스였다고 한다. 이왕이면 착 달라붙는 드레스 대신 여성 건강에 도움 되는 헐렁하고 편한 차림으로 꾸미던지, 뭔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지만 더 이상 외모가 아닌 내면적 아름다움을 찾자는 의도가 보이긴 했다. 보석 박힌 번쩍이는 하이힐을 신고 진창길이나 자갈밭을 가지는 않는다. 하이힐은 육체노동을 하는 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이힐 신고 오랜 시간 일하면 발과 허리가 아파서 엄청 고통을 받는다.

미국 사는 한인여성 중에 하이힐을 애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아이를 학교 데려다주고 데려오느라, 새벽부터 가게 문 열거나 직장에 나가느라 정신이 없지만 그래도 가끔 하이힐을 신고 싶은 여성의 마음은 무엇일까. 화려한 외출을 꿈꿀 때, 키 커 보이는 대리만족, 뭐 그런 것? 아무튼 하이힐을 신는다는 것은 생업의 터전에서 운동화 신고 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진창길 대신 마른 길만 걸어도 된다는 것일 것이다.

요즘, 하이힐 신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제 그만 진창길을, 이 눈폭풍 부는 겨울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이번 주말 또 폭설이 내린다는데, 하이힐에 먼지 앉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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