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밥을 벌자

2014-01-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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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31일인 오늘은 음력으로 1월 1일 우리 고유의 명절 설날이다. 지난 27일 뉴욕타임스는 한국 설 명절 선물로 ‘스팸’이 인기라고 대서특필했다. 이 스팸과 김치를 넣어 만든 부대찌개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주한미군이 축소되고 대학생들의 반미시위가 확산돼도 스팸의 인기는 높고 PX 상품에 대한 한국의 사랑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미국 저소득층이 먹는 정크 푸드 스팸이 최고급 수입와인, 자연산 버섯, 정육세트와 함께 한국의 명절 선물로 나란히 팔고 있다고 했다. 유기농 식품을 찾고 고급 외식 문화에 길들여지고 몸만들기에 여념 없는 한국민들이 왜 스팸은 먹는가? 햄의 짭짤한 맛, 김치의 매운 맛, 라면까지 넣어 만든 부대찌개도 좋아한다는데 설마 맵고 짠 것이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모르지 않겠지.


돼지고기의 넓적다리 살을 훈연한 햄을 깡통에 담은 스팸은 1937년 미국 미네소타 식품업체 호멜푸즈에서 처음 생산했다.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대량 광고를 했는지 인터넷 세상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메일에 스팸이란 말이 붙었다고 한다.
부대(部隊)찌개는 말 그대로 군대의 찌개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폐허 위에 겨우 살아남은 이들에게 심한 굶주림은 공포였다. 기아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의정부나 송탄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핫도그, 스팸 등에 고추장과 김치를 넣어 한국식 찌개를 끓여냈다.

한입이라도 더 먹으려고 양배추, 양파도 넣고 하여 푸짐하게 양을 널린 이 찌개는 고기가 부족하던 시절, 부자나라에서 온 ‘부와 영양’을 먹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을 것이다. 이 고기 중에는 미군들이 먹다 남긴 반찬, 몰래 빼돌린 보급품도 섞여있었다.

부대찌개의 유래는 참으로 감추고 싶은 역사다. 하지만 서민들이 잘 먹고 좋아하여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아마 한국민들은 못살던 시절의 향수를 먹고 있는 것이 아닌 가 싶다. 가난과 고통의 시대를 이겨낸 지금이 자랑스럽지만 배고프던 그 시절을 결코 잊지 말자는 것 말이다.

옛날을 추억한다는 것은 지금은 살만하다는 것이다. 먹고살기에 허덕이면 추억에 잠겨들 시간과 여유가 없다. 그러고 보면 뉴욕에 사는 한인들이 명절 선물로 스팸 세트를 주었다든가, 받았다는 말을 별로 못 들었다. 선물이 아니라 욕이 될 지도 모르겠다.

한인상가에서 몇 년간 장사를 잘 하던 식당이 치솟는 렌트에 문을 닫고 수시로 날아드는 티켓에 질려 델리 문을 닫고 이제, 어떻게 먹고사나 막막하다는 사람들, 나이가 들수록 먹고 산다는 것만큼 삶에서 중요한 게 없다고들 한다.
얼마 전 작가 김훈의 ‘발벌이의 지겨움’이란 책 제목을 보고 단숨에 그 책을 읽어 내려간 적이 있다. 병자호란시 인조의 무참한 피난을 다룬 소설 ‘남한산성’과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다룬 소설 ‘칼의 노래’로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에게 나오는 인세가 엄청날 텐데 왜 밥벌이를 위해 그리 애썼나 궁금했다. 얼른 뒷장을 보니 초판이 2003년도에 나온 책이다. 작가가 전업 작가로 나선 것은 2004년, 아마 그 때는 밥을 벌러 생업에 종사한 것같다.

그 속에 이런 내용이 있다.
‘전기밥통 속에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발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여, 별 도리 있겠는가. 전기밥솥에서 풍기는, 익어가는 밥 냄새가 얼마나 좋은 가. 이 밥을 벌기 위해 설날에도 열심히 나와 일하고 있지 않은지, 오늘 아침 떡국은 드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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