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인 ‘한복 입은 남자’

2014-01-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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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고 사학자 천관우 님은 생전에 여러 모로 필자를 도와주신 분이다. 그러니까 어쩌다 미국에 오게 된 것도 그 분의 영향이 있었다. 하여튼 저서가 나올 때마가 이곳까지 꼭 보내주셨다. 그 중 어느 책의 책표지를 열자마자 17세기 플란더스의 화가 피터 폴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와 마주치면서 순간적으로 그는 필자의 애인이 되어버렸다.

그림 속의 남자는 낯선 한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있다. 그가 그 시절 유럽에 있었다는 것, 자연스럽게 예전 한복인 요선철릭을 입고, 두건을 쓰고 있다는 것,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위풍이 있고, 씩씩한 모습이다. 외딴 곳에서도 거리낌 없는 당당한 모습이 남자답다. 그렇게 겉모습만 보고 애인이 될 수 있나? 애인의 수효가 단수가 아니고 복수일 경우는 어떻게 하나? 도대체 애인의 정의는 무엇인가? ...등등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전을 보면 애인은 ‘이성간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정의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생사를 불문하고, 실존하거나 상상 속의 사람이거나 가리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필자에게, 머리를 번득이는 신묘한 생각을 주는 것으로 족하다.

한 예로 어린이들이 애인인 까닭은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 조금도 꾸밈이 없이 아주 순진하고 참된 것 하나로 충분하다.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는 위풍당당함으로 충분히 애인 자격이 있다. 애인의 성별이나 수효에 제한이 없다. 그 이유는 애인에게 직접 바라는 것이 없고, 이쪽에서 필요한 것을 그들에게서 취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한 애인의 정의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수의 애인을 소유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새해 계획 중의 하나는 이런 애인의 수효를 더 늘리는 일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가까이서 자세히 살필수록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애인이 많다는 것은 자신의 성장을 돕는다. 더욱이 그 애인들이 부양가족이 아닌 점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이런 마음의 변화는 애완동물이나, 사용하는 물건에도 옮겨질 가능성이 있다. 애인들 속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엇이나 일방통행은 부자연스럽다. 왜 애인만 구할 것인가. 내 자신이 다른 사람의 애인이 될 수는 없는가. 누구의 애인이 되더라도, 자신의 마음과 겉모습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또 친절함, 너그러움, 이해심, 협조심을 가지고 주위의 사람들을 대하며 사랑을 나눌 때, 누군가의 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되는 세상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아! e-mail이 왔다. 그것도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의 편지다. “나는 그 옛날, 옛적에 이런 저런 사연으로 외국에 살게 되었다. 나는 마치 요술나라에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주위의 자연, 살고 있는 집,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러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쩌랴, 여기서 살아야만 하니…. 나는 내가 살던 방법을 알리면서, 당당하게 살기로 하였다. 그랬더니 우리는 점점 서로 배우면서, 나누면서 생활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여러분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지 궁금하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e-mail을 보낼 차례다. “한복 입은 남자님, 반갑습니다. 우리는 살고 싶은 나라를 자유로 선택하였습니다. 한민족의 활발한 해외 이주는 국력의 신장이고, 한국문화의 세계화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옛날 유럽에서 생활한 선배가 있어 자랑스러움과 용기를 줍니다.”

우리의 선배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는 그 옛날 해외에 살던 우리의 선배이다. 그의 당당한 모습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의 표현이다. 이런 마음으로 생활한다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다고 본다. 주위의 다른 사람을 애인으로 만들고, 내 자신이 그들의 애인이 되는 세계에는 사랑이 넘칠 것이다. 이런 쓰나미 현상은 환영할만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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