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학문과 영생

2013-12-3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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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구(목회학 석사)

나는 학문을 많이 아는 자들만큼 학문을 사랑한다. 그리고 적당한 용도에 쓸 줄만 안다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문은 둔중한 심령들을 만나면 소화되지 않는 뭉치로 심령들을 눌러 질식시킨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일에서와 같이 학문연구에도 무절제 때문에 고통 받는다. 현명한 정신에는 문장이 그다지 필요치 않다고 했는데 어느 경우에는 매력적인 언어에 끌려 의도하지 않는 문장을 쓸 때도 있다.학문이 우리에게 권장하는 교훈의 대부분은 힘보다 겉치레가 많고 실속보다 장식에 치우치기도 한다. 인간의 지혜가 수 백 개라면 한 개도 제대로 사용치 못한다고 한다.


고대 철학자 소르딘이 정신없이 들떠서 말하고 있는 동안 완전히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바람에 아내를 보고 “레베카 지금 말하고 있는 게 나요?” 하고 물었듯이 학자가 그 철학 감각에 도취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천년 교계의 교의(교회법)를 지배했던 종교가로서 교구철학의 집대성자 알렉산드리아 히포출신의 아우구스투스는 “많은 교구들이 단 몇 권의 책을 읽고 진리가 이런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곳에서 나는 떠났다.”고 말했다. 그가 로마에 가서 연구한 많은 학문은 스콜라철학의 실제론에 반영되었고 또 프란체스코에 직결돼 지금까지 기독교에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학문은 때로는 세상에서 제일 알기 쉬운 일을 까다롭게 만들 때가 있다. 수많은 책을 읽고 한 권의 책을 쓸 것도 모두가 거의 차용이며 창작은 극소수라 했다. 그래서 ‘플라톤의 목소리에 칼뱅의 손’이라 했던가. 어떤 자는 만물은 생성하고 소멸한다고 가르치고 또 다른 학자는 만물은 결코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그들은 자연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도대체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마음대로 바람을 일으키고 비가 내리도록 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신들의 행위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학문으로는 다하지 못해도 성경으로는 다 이룰 수 있는 진리가 있다고 한다. 인간이 왜 사는가에 대해 학문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성경은 영생을 준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또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장24절) 했다. 2014년 새해에는 여러 권의 책 보다 한 권의 참된 진리의 책을 접해봄이 어떨까. 모든 인간의 대속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생전의 행적과 십자가 고난을 통해 보여준 사랑과 용서의 진리가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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