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아 가면서

2013-05-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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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 필수과목

주한 미군시절 메릴랜드 대학 분교에 다녔다. 수강생들은 고졸인 어린 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경제적 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시골 출신들이 많았다. 대학교 등록금은 국가 보조로 공짜나 마찬가지다. 학교에 다니는 군인은 일석이조의 혜택을 받는다. 정식 교수로부터 표준 영어도 배우고 한편 진급 심사할 때는 가산점도 받는다.

영작문(English Writing)은 교양 필수이다. 원어민 학생에게도 제일 어려운 과목은 영작문이라고 한다. 외국 대졸자도 교양 필수 과목으로 영작문은 이수해야만 한다. 최소한의 글 쓰는 수준은 있어야 대졸 자격이 인정되는 것이다. 미국 대학에서 교양 필수 교수들의 권위는 대단하고 학점의 기준은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분교에서 영작문이 오픈되는 경우는 드물다. 수강생이 적고 선생님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반에는 여나 무명으로 시작해서 반만 남고 반은 수강을 취소했다. 제 2외국어 학생은 나 혼자 뿐이었다. 수업은 재미있는데 타자로 친 에세이를 일주일에 한 번씩 제출하는 숙제는 어려웠다.


돌려받는 숙제는 아예 빨간색이다. 고친 문장이나 설명은 빨간 볼펜으로 줄치고 적었으니 아예 검은 글씨는 보이지도 않는다. 밤낮 틈나는 대로 쓰고 읽고 고치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영타 속도는 느린데다 철자도 틀리니 한 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짧았다. 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 하나로 버틴 그 학기는 전쟁을 치르듯 지나갔다.

결국 C학점을 받았다. 시시한 C가 아니라 날듯이 기쁜 C였다. 반신반의 다시 보아도 통과하는 C였다. 반면에 영어 말하기(English Speech) 교양 필수는 B를 받았지만 아쉬운 기분이었다. D학점은 면했으니 미국 대학교 졸업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C를 받은 그날 선생님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고 한다. 예수는 종교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로 오랜 시간 믿음도 정치도 바꾸어 놓았다. 일국의 대통령은 나라를 바꿀 수 있고 부모는 가풍을 만들 수도 있다. 꿈의 씨앗이 잉태하여 현실을 낳듯이 결심하기에 따라서 생각이라는 무대에서 실체적인 유를 창조할 수 있다. 모두 생각하기 나름이다.

요즘 실전 수필 강의를 듣고 있다. 다수의 수강생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들이다. 약 열댓 명이 너무나 열성적으로 배운다. 조리 있는 연설도 어렵지만 짜임새 있는 글짓기는 더욱 어렵다. 말은 흩어져 하늘로 사라지지만 글은 언제 어디서든 기록으로 남는다. 수필은 마음속의 생각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새 생명으로 태어난 글을 보고 읽고 듣고 앞뒤 문맥을 이리저리 재고 저울질한다. 붙이고 자르고 넣고 빼는 살벌한 수업이다.

피천득의 청자연적을 고등학교에서 배웠다. 요즘 강의를 들으면서 40년 가슴 속에 묻혀 있던 수필의 씨앗이 자라는 것을 느낀다. 수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년을 넘기면서 쓰는 향기 나는 단순한 글이라 했다. 여기 저기 생활의 소재도 많고 편안하게 쓸 수 있어 쉽게 선택할 수 있었다. 학처럼 고고하고 난처럼 향기 나게 생활하면 술술 쓰겠지만, 선택은 쉬웠는데 배우면 배울수록 쓰면 쓸수록 어렵다.

마음을 다스리고 생각을 가다듬는다. 작은 일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돌려보며 생각한다. 욕심의 날개를 내리고 마음은 가볍게 움직인다. 배운 대로 비우고 내려놓는 마음의 산책운동을 준비한다. 위로 아래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심전심 따뜻한 기운이 글 마당 안에 피어난다. 독자의 마음에 조용히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다.

종강할 때 C학점이라도 받아야겠다. 전공은 수필이다. 여름 특강에 시시한 C만 받아도 전공 필수는 마치는 것이다. 수필가의 날개가 펴지는지 몸이 가벼워진다.


강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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