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13-04-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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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 진리의 꽃자리, 중도

단 한 글자만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이 한 마디의 끝 글자, ‘나’를 ‘지’로 바꾸어 그렇지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그 인격이 바뀐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옳고 그름, 너와 나, 선과 악 등 둘로 나누어 이항 대립적으로 ‘경계 지움’하여,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흑백적 선명성의 논리와 택일적인 사유방식에 길들여져 있다. 물론 그러한 사유방식이 정량적 물리량을 정확히 이끌어내게 함으로써 인류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은 물론 바라보는 세상도 바꾼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한 마디는, 세상의 양면성과 다양성,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지한 탈 이분법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로 인한 이해와 긍정, 포용과 화해의 발현이라 하겠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한다. 중도는 진리로서 불교의 처음이자, 실천해야 할 최대의 가치로서 마지막이다.

중도란 이념적인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서 양극단의 장점만을 취하거나, 황새다리 잘라 뱁새다리에 붙여 늘리는 식의 절충을 위해, 적당히 성찰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제3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정치적 중도가 아니다.

또한 중도는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다를 바 없다는 취지로, 양극단의 실재 속에서 이원성이 주는 긴장과 갈등을 적절한 조화와 균형으로 극복하게 하는 중용과도 다르다.

불교의 중도는 먼저 양극단을 떠나라고 한다. 떠나 보면 양면성을 이해하고 용인하게 되어 대립과 갈등은 사라지게 된다. 양극단을 떠나라는 의미는 양극단의 중간이나 평균치가 아니라 ‘무 입장의 입장’이며, 양면성의 용인은 이것과 이것 아닌 것까지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을 의미한다. 양면성은 빛이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듯이 자연의 필연적인 존재 양태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중도는 연기 속에서 발견된 공성의 실천적 표현이다. 연기란 모든 사물과 정신작용까지 인연조건에 의한 의존적 생기, 즉 상관성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본질적으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독립된 불변의 실체인 자성이 없기에 공(空)한 것이다.

예를 들면, 선이라는 개념이 있어 악이란 개념이 있고 악이 있어 선이 있는 것이어서 선악은 연기관계이다. 또한 이곳에서의 선이 저곳에서는 악이 되고 저곳에서의 악이 이곳에서는 선이 될 수 있어, 선과 악은 자성이 없는 공이다. 따라서 선악은 대립이 아니라 선의 그림자가 악이며 악은 선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힘이 되므로 공존하는 것이다.

결국 연기와 공성을 함께 조망하는 것이 중도다. 중도는 둘로 나누어 서로 투쟁케 하는 호전적인 논리가 아니다. 실체(자성) 없는 양변의 개념에서 해방되어, 서로 다르지만 상호작용하는 ‘차이와 동거’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이법이다.

그래서 경계를 넘어 중도의 삶을 사는 사람은 부득이한 차별 속에서도 평등을 잃지 않고 평등 속에서도 부득이 차별을 쓸 줄 아는 걸림 없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 견고한 대립의 경계가 무너진 중도의 자리는, 새로운 생명력으로 충만한 자리이며 아름다운 진리의 꽃자리가 된다. 그런데 시인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다. 아리송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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