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 대통령 취임식을 보면서

2013-03-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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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상, 깨달음

▶ 송 순 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김형!
지난 24일 저녁에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중계방송을 보았습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처럼 화려하고 자연스럽고 뜨거운 축제의 열기가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소박하고 근엄한, 그러면서도 깔끔한 취임식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엇갈렸습니다.

작고 연약하고 그리고 불행했던 한 여성의 어깨에 우리 5,000만 겨레의 내일, 그 미래 5년을 올려놓는구나 하는 생각과 어쩌다가 우리 민족의 현실이 이렇게 이 연약한 한 여성의 리드에 맡겨져야 하는지 아쉽기도 했고, 그런 책임을 떠맡고 첫 걸음 내딛는 여성 대통령이 안쓰럽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남성들의 그 절제 없는 정치투쟁과 끝없는 부정으로 큰 그릇이 못되고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강인한 생명력과 생활력으로 인고의 세월을 건너 우리의 가정 지켜내던 여성들이 이제는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서 나섰구나 싶어, 저도 한 남성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마치 그런 나 자신이 여성 대통령 취임식에서 회오와 각성의 남성 자리로 내몰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부터 거들먹거리기나 하는 남성들의 방종에 가까운 사대부 놀이와 양보를 모르는 정쟁 때문에 국권은 힘을 잃고 결국은 나라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 잃어버린 나라의 가장 밑바탕에서 쓰라린 고통과 치욕을 견뎌내어야 했던 이들은 겨레의 여성들이었습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하는 모습에서, 걸식을 하면서 아들을 뒷바라지 하던 김구의 어머니가 보였고, 사임당 신씨가 보였고, 고 박정희씨의 그 무자비할 정도였던 경제건설의 드라이브 뒤에서 어머니 같은 부드러움으로 국민들에게 여성성을 나누다가 흉탄에 쓰러지던 육영수 여사의 불행도 보였습니다.

김형!

저는 그 중계방송 앞에서 우리나라 남성 정치인들이 각성하고, 우리나라 관료들이 청렴한 직무 자세를 되찾고, 교육자들이 근검하고 겸양하고 꿋꿋한 민족이념을 일깨우는 교육을 되살려주기를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균형 잡히지 않은 민주주의가 이제는 자제와 이성을 찾아나갔으면 하는 생각, 민족 분단이라는 엄연한 현실에서 방종에 가까운 인권과 사회연대들이 책임 있는 제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생각, 굶주리는 동죽을 북쪽에 두고 분에 넘치는 사치와 먹고 마시는 졸부들이 그 탐닉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 보수니 진보니 하며 큰소리치던 남성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던 국회의 당략당리 정치가 이제 국가와 국민을 염두에 두는 큰 정치로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김형!
취임식 중계방송을 보면서 수줍음이 가시지 않은 박근혜씨의 미소에서, 한복차림으로 청와대의 계단을 오르는 박근혜씨의 뒷모습에서, 박근혜씨의 개인적인 감회보다는 그녀에게 정권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한국 유권자들의 선택이 저렇게 안쓰러운 것이었구나 싶었습니다.

가난과 좌절 속에서 독재를 견디고, 허기를 참아가며 노동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우리 국민들이, 여성 대통령을 선택한 오늘, 동아시아의 주변 강국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더 도약하고 번영을 굳혀나가기를 빌었습니다.

김형!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감성적인 어조였다 싶습니다.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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