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 사람을 가졌는가

2013-03-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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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속의 부처

▶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취임식이 끝난 날, 민간인 신분이 된 이 명박 전 대통령이 그동안 함께 일했던 참모들과 사저 근처 한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수첩에 적힌 한 편의 시를 담담하게 읽어내려 간 모양이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많이 알려진 이 시는 바로 ‘씨알’의 큰 스승 함석헌 선생이 쓰신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제목의 시다.

이 전 대통령이 아무런 설명 없이 시낭송을 마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숙연해졌다고 한다. 그 속내야 헤아릴 길 없는 일이지만,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내려놓은 홀가분함과 아쉬움, 착잡함과 허허로움, 그리고 일말의 막연한 불안감까지 뒤섞인 듯한, 그 복잡한 심사를 조금은 짐작할 수가 있겠다.

이 시는 특히 암울했던 지난 ‘그 시대’ 뜻 있는 사람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자주 애송되고는 했다는데, 이번에 새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아무튼 누구든지 이 시를 접하게 되면 나는 진정 그 사람을 가졌는가하고 스스로 되묻게 된다. 그러나 그 물음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또한 나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진정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를 되묻게 되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드물 것이다. 오히려 내가 먼저 살기 위해 남이 가진 구명대를 빼앗지는 않았는지, 뒤틀린 용심으로 물귀신처럼 매달려 함께 죽자고 한 적은 없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아무튼 그 사람을 가지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마땅하기에 지속적이고 뼈저린 수행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이 내 마음의 눈에 보여야 한다. 그러나 나를 버린 만큼만 세상과 남이 보이는 법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차츰 남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자행(?)된 이기배타적인 삶이 남도 좋고 나도 좋은 자리이타적인 삶으로 전환된다. 자리이타적인 가치와 삶은 자비와 헌신의 토대 위에서만 구축된다. 그 거룩한 자비와 헌신은 지혜에서 발현되며, 지혜란 언제나 ‘나 보다 내가 낮아지기’가 인격의 완성을 위한 궁극의 힘임을 자각하는 바와 다름 아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나를 비워야 한다. 불교의 ‘나 비움’은 결코 찾을 수도 없는 나, 그러나 지독한 아집으로 쉽게 버릴 수도 없는 나, 그나저나 본래 없었던 그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내가 있는 한 나는 나밖에 되지 못한다. 그 지극히 견고한 아집의 껍질을 깨고 장렬히 산화하면 바로 해방이다. 그리되면 모두가 나인 것을. 모두가 그 사람인 것을, 이미 모두의 그 사람인 것을.

그럼에도, 정녕 나라는 이 한 물건을 그냥 쉽게 놓을 수는 없단 말인가.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도 못하고/ 아 고생이구나/ 나를 떠나면/ 두루 하늘이고/ 사랑이고 자유인 것을”

(정현종의 시 ‘어디 우산을 놓고 오듯’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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