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가지

2013-02-28 (목)
크게 작게

▶ 살아가면서

▶ 강 신 용 <공인회계사·수필가>

아침 이슬이 마당에 가득하다. 월초에 천도복숭아의 꽃망울이 하나둘 보이더니 어느새 푸르른 새싹으로 가득하다. 한쪽에 서있는 자두나무는 아직도 겨울잠을 자는지 온통 검정색 가지만 보인다. 마당 가운데 조용히 서있는 무화과도 한껏 망울이 부풀어터질 듯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나무들이 한 겨울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도 제 각각 다르다.

비에 젖은 땅에는 새싹의 신바람이 한창이다. 촉촉이 물먹은 부드러운 틈새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싹이 보인다. 죽은 듯 숨어 있던 씨앗들이 조용히 내린 빗소리로 생명의 소리가 마당에 가득하다. 연초에 뿌려 두었던 여러 가지 채소 씨앗들이 자라나 하나하나 자신의 잎사귀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여러 해 전부터 절로 자라주는 양귀비의 생명력은 엄청나다. 마당 구석구석에 자라는 것이 마치 새싹의 선봉장 노릇을 하는 듯하다.

지난 연말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지난해 11월 한국으로 건강검진을 다녀왔다. 사전에 검사하고 예방하는 것은 장수비결 중에 세 번째라고 한다. 체중을 줄이는 것이 문제였다. 해답은 앞마당에 있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상추, 양귀비, 신선초 등등 먹을거리 야채가 잘 자라고 있다. 아침이면 수북이 자란 야채를 솎아 바가지에 가득 담는다. 아침 식사는 고소하고 노릿 노릿한 배춧속에 여러 가지 푸성귀를 넣고 쌈장을 발라 먹는 것이다. 배춧속 다이어트를 계속하고 있다.


박 바가지는 내가 직접 만들었다. 연전에 마당에 앞뒤로 박을 심었다. 화분에 심었던 조롱박은 잘 자라 여럿이 달렸으나 남가주의 건조한 땡볕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한 통조차 거두지 못했다. 울타리에 심은 한 포기 박은 땅 맛을 보았는지 악착같이 담을 타고 넘고 하더니 보름달만큼이나 큰 박 한 덩어리를 남겼다. 긴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도록 잘 버틴 조선박 한 개를 수확했다. 애지중지 키운 박이라 더욱 정이 가는 바가지이다.

바가지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흥부놀부전에서는 슬금슬금 톱질한다고 했는데 단단한 박 껍질은 자르기 쉽지 않았다. 하얗고 크게 자란 박을 자르면서 흥부의 금은보화도 생각하고 놀부의 도깨비도 생각났다. 겨우 톱으로 자른 박을 푹 삶을 만한 솥단지가 없어 그냥 반쪽씩 마이크로 오븐에 넣어 익혔다. 전자파에 익은 속살은 단단하게 바가지에 붙어서 매끈하게 박 속을 긁어내기는 너무 어려웠다. 아마추어가 만든 바가지가 바깥에서 지내다 올 들어 제 몫을 하기 시작했다.

박은 시골을 생각나게 하는 친근한 농작물이다. 흥부전은 착한 사람이 되라는 어린이 동화이다. 제비와 박씨, 가난한 농사꾼 흥부 그리고 씨를 심고 박이 자라는 자연의 순리를 통해 주인공이 살아가는 모습을 비교한 이야기다. 착한 흥부의 생각은 박으로 김치(?)도 만들고 바가지를 팔아서 식구들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박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져 부자가 된다. 한편 부잣집 흥부는 음흉하게 박 씨를 얻고 부정하게 더 큰 부자가 되려다 망해버리는 이야기다. 돌고 도는 돈은 선량한 흥부네 집에서 쌀바가지가 되었다.

바가지는 여러 가지로 사람과 비교된다. 사람의 행실을 보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고 한다. 주책없는 사람은 주책바가지라고 한다. 물을 퍼는 바가지는 물바가지, 쌀을 퍼는 바가지는 쌀바가지라고 한다. 바가지 긁는 소리에 쪽박을 찬다는 말도 한다. 거래를 할 때 바가지를 쓰기도 하고 바가지를 씌우기도 한다. 바가지는 순박하게 자라 끓는 물에 오래도록 담금질하고 속없이 반쪽으로 태어난다. 사람이나 바가지는 담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그릇의 운명이다.

링컨 대통령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고 했다. 공자는 40이면 불혹이라 했다. 사람 얼굴은 살아온 인생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도 한다. 얼굴의 주름이 손금에 새긴 팔자보다 더 사실적이다. 이슬에 세수한 야채들을 바가지에 담으며 다이어트를 준비한다. 건강한 몸에 감사한 마음을 담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