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볼모

2013-02-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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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상, 깨달음

▶ 송 순 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순수한 우리말 중에 ‘볼모’라는 어휘가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한 약속의 이행이나 복종의 유지라는 이유로 소중한 사람을 상대에게 맡겨놓는 행위를 이름씨화한 우리말 단어입니다. 같은 뜻의 한자어도 있습니다. 인질(人質), 유질(留質), 질자(質子), 시자(侍子) 등이 그 유의어들입니다. 보다 실정법적인 법률용어로는 저당(抵當)과 담보(擔保)라는 명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사람과 재물이 동일하게 담보나 저당의 대상이 됩니다. 이 외에 약간 차이를 갖지만 비슷한 경우로 차용되는 어휘가 있는데 ‘희생물’이니 ‘제물’이니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원래 제물이나 희생물을 바치는 대상이 신이었지만 신에 대한 제사가 사라진 현대에 와서는 안전이나 평화, 혹은 흥정의 대가성으로 그 의미가 일반화되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볼모나 인질은 그 약속집행이 유보적인 것이지만, 희생물이니 제물이니 하는 것들은 환원 불가능한 집행 완료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볼모를 보낸 사례가 많습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이조시대에 중국을 섬기겠다는 보증으로 왕자들이 명이나 청의 볼모가 되었고, 더 가까운 일제 치하에서는 이우 왕자가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볼모를 보낸 나라로서는 그것이 굴종과 치욕이었고, 볼모를 잡은 나라로서는 그것이 지배와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시대에 와서는 자주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탈법적이지만 개인이나 조직체가 어떤 조건을 내걸고 막무가내식으로 하는 인명몰수 행위가 그것입니다. 좁게는 우리사회에서, 넓게는 국제사회에서 빈번하게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프리카 서북단의 국가 알제리의 천연개스 생산시설에서 일어난 인질사태는 볼모와 인질이 가지는 비극적인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국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슬람 무장세력 테러리스트들과의 협상은 없다는 알제리 정부의 결단은 그동안 인질극에 시달려 온 세계인들에게 이해가 안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질들 중에는 여러 국가의 국민들이 섞여 있었고, 따라서 자국의 인질을 구출하려는 국가들과 국제사회의 지원과 노력이 채 실행되기도 전에 이를 무시하고 알제리 정부는 무력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해 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질들의 희생이 불가피하였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당하는 고통과 슬픔은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최근에 북한의 핵실험 위협을 두고 주변 당사자 국가들이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동결과 압박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북한의 굶주리는 주민들을 볼모로 하는 해당 국가들의 정치적인 도박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주변 국가들의 경제압박이나 모두 결과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말이야 한 쪽은 강성대국이 목표이고, 상대국가들은 살상무기 억제가 목표이지만, 그 와중에서 북한 주민들이 겪는 볼모적이고 희생제물적인 고통은 눈물겨운 것입니다. 볼모들을 두고 정치적인 게임을 하는 국가들은 객관자의 윤리로 국익과 정치를 저울질하겠지만, 인질 당사자들의 윤리로는 생과 사의 질곡을 넘나드는 절박하고 눈물겨운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볼모라는 말은 쉽지만 어느 누구도 그 볼모된 당자자들과 가족들이 당하는 공포와 고통은 당해 보지 않고는 이해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기에 객관적인 윤리로라도 인명을 두고 함부로 흥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북한 문제의 비극이 있습니다.

우리 북한 동족들이 아프고, 서럽고, 한스러운 볼모라는 질곡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때가 진정 언제 오게 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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