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명예와 책임 사이에서

2012-12-1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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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윤실 호루라기

▶ 김기대 목사 <평화의교회>

불교에서 보살은 보디사트바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종교의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을 지칭하는 말인데 오늘날은 사찰에 기여를 하거나 나이든 신도들에 붙는 호칭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다른 이의 운수를 봐주는 사람들이 모두 너도 나도 보살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다. 천주교에서 종신부제는 사제가 아닌 일반 신도에게도 주어지는 직책이다. 그들은 안수 받은 사제가 아니지만 사제를 보좌하는 부제로서 역할을 한다. 이들에 비한다면 개신교에는 많은 직책들이 있다. 한인타운에서 장로님과 집사님을 불러보면 열에 아홉은 돌아본다.

종교개혁 이후 시민의 권리 증대와 함께 교회 내 평신도들의 역할이 많아지는 과정에서 직책이 생겨났다. 혹자는 이런 직책이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물론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직책 개념을 설명하는 정당성의 근거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이것은 근대적 시민의식과 함께 시작된 제도이다. 이런 출발을 가진 개신교 직책은 양날의 칼과 같다. 한편으로는 상명하달식의 타종교에 비해 평신도의 권리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고, 그것이 곧 서구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발전과 맥을 같이했기에 자랑해도 되는 제도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종교의 직책 개념이 깨달음이나 사제의 보좌라는 특징을 갖는다면 개신교 직책은 자칫 권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다.

문제는 권력으로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교역자들은 그것의 본래적인 정신은 망각한 채 직분을 매개로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 한다. 당사자들은 시민의식의 성장과 맥을 같이한다는 직분제의 자랑스러운 역사에는 무지한 채 권력과 명예의 도구로 직분을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책임의식과 봉사는 오간데 없고 매관매직과 같은 소문들이 들려온다. 그릇된 절차를 통해 선출된 대표는 대표성이라는 권위를 상실하고, 공동체는 표류하게 된다. 어떤 이는 안 되어서 떠나고, 어떤 이는 작은 교회에서 직분을 쉽게 얻고 나서는 대형 교회로 옮겨 ‘협동’으로 대접받는다. 참된 권위는 존경받아야 하고 그들의 결정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오늘날 직분자들의 권력행사가 눈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분자들에게 교회만 알게 할 것이 아니라 시민의식을 일깨워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들이 교회를 위해 세움을 받았지만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기에 그들의 능력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멀쩡하던 사람이 교회 직책에 욕심을 내고 나서는 사회 참여와 같은 교회 밖의 일을 외면하고 교회 안으로 매몰될 때 교회 직분제도의 병폐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임기제나 여성 청년 몫의 직분을 확대하는 것도 잡음을 없애는데 도움이 된다. 항존직이 아니라 정해진 임기마다 새롭게 신임을 물음으로써 권력화를 예방할 수 있다. 여성과 청년 몫을 확대함으로써 직분이 권력과 금력의 영역이 아니라 나눔과 봉사의 영역이라는 것을 서로 인정해 나가야 한다. 거기서 얻어지는 명예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명예이다.

정치의 계절이 되면 사람들은 정치계를 향해 쇄신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비웃는 정치계도 임기제가 있으며 여성과 청년, 직능의 대표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일정부분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아직도 교회가 권력적 직분제의 철옹성에 갇혀 있는 한 교회를 향한 사회의 질타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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