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퀴 빠진 여행 가방

2012-11-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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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하는 삶

▶ 김 범 수 <치과의사>

11월은 아프리카 단기선교를 떠나는 달이다. 지구 반쪽 아래 편인 케냐는 지금 여름이다. 여름옷만 챙기면 되니 개인 짐이 간단해 좋다. 가방의 나머지 공간은 진료 장비들과 약품, 현지 선교사에게 필요한 물품들로 채워질 것이다.

샤핑에 그다지 취미도 안목도 없는 나이지만 여행가방 사는 일에는 자신 있다. 해외로 선교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지난 15년 동안 사들인 가방만도 100개는 넘을 것이다. 매번 가방이 미어터지도록 물건을 실어 날랐으므로 가방가게 주인이 아무리 10년은 보장한다고 큰소리 쳐도 한 번 다녀오면 털털거리는 헌 가방으로 변해 버린다.

소위 이민가방이라는 무정형의 헝겊가방을 한 번에 10~20여개씩 사서 함께 떠나는 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여기에 짐을 잘못 싸면 이리저리 씰그러진다. 그러면 차곡차곡 쌌던 물건들을 다 꺼내어 처음부터 다시 집어넣는 수고를 반복해야 한다.


예전에는 가방 하나마다 70파운드의 무게를 쌀 수 있었는데 9.11 이후부터인가 50파운드로 바뀌었다. 우리 집 몸무게 저울은 가방 무게 재는 용도로 더 많이 쓰인다. 이민가방을 올려놓으면 저울 눈금이 안 보이니 먼저 내 몸무게를 재고 내려와서 꾸려놓은 트렁크를 으쌰! 들고 다시 올라간 다음 뺄셈으로 가방 무게를 재는 것이다.

저울 위로 십여 차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1파운드라도 비면 아까워서 현지인들에게 나눠줄 물건을 끼워 넣고 혹 넘으면 다시 지퍼를 열어 내 짐부터 줄이고 본다. 이 동작을 짐 하나당 스무 번 정도 하고 나면 팔이 떨어지게 아픈데 가방 그득히 물건을 잘 쌌을 때는 흐뭇하고 보람이 있다.

선교지용 치과기재들은 컴팩하게 작아진 대신 무거워서 이민가방에 넣지 못하고 딱딱한 샘소나이트 가방 같은 데 넣는다. 이것 역시 한 번 다녀오면 고장이다. 공항 탑승구 복도에 서서 유리창 밖으로 비행기에 짐 싣는 모습을 구경하노라면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수화물 칸으로 올라가던 가방이 떼구르르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직원들이 가방을 거침없이 휘익! 던져대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뿐인가. 경비행기를 서너 번 갈아타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선교지의 도로라는 것이 대부분 울퉁불퉁 흙자갈길이거나 곳곳에 웅덩이가 패인 진흙탕이라서 고급 트렁크 바퀴라도 덜덜덜 고장나고 떨어져 나가면 그만. 집에 올 때 바퀴가 세 개라도 남아 있으면 다행이다.

현지에 도착해서 가장 마음 조리는 일은 수화물로 부친 가방들이 잘 도착했을까 하는 것이다. 선교팀 십여명이 부친 짐은 스물 몇 개가 넘는데 비행기를 수차례 갈아타는 동안 분실사고를 당하면 당장 짐이 없으니 일을 시작할 수가 없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구, 하나님, 제발이요!’ 뿐이다.

요즘 또 짐을 싼다. 사재기로 모아둔 가방이 십여개다. 가져갈 물품도 많이 쌓여 있다. 현지에서 만나게 될 젊은 한인 선교사 한 분의 연로하신 어머님이 부탁한 짐도 있다. “우리 아들이 좋아하던 새우깡하고 손주들 군것질거리 조금 넣었어요.” 최근 결혼한 젊은 커플이 신혼여행을 대신하여 선교지를 찾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현지 선교사님은 나에게 특별히 양초 두 자루를 부탁했다. “밤에 불도 없는데 신혼방에 켜 주려구요.” 얼마 전 항암치료를 받고서도 꿋꿋이 사역을 계속하는 선교사님의 항생제도 챙겨간다.

짐이 많다. 그러나 언제 고장 날지 모르는 가방을 싸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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