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깨침과 달음질

2012-08-0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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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속의 부처

▶ 박재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도대체 얼마를 더 틀고 앉아야 깨달음이라는 놈의 뒤꿈치나마 뵐 수 있단 말입니까?”

어느 날, 문하에 들어 겨우 석삼년(9년)을 넘긴 제자가 느닷없이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헌데, 화들짝 놀란 스승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또 다시 억장 무너지는 한 말씀을 무겁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깨달음을 깨달을 때까지!”

그 깨달음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지금까지 우리가 세뇌(?)되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나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고도의 관념적 사유와 고난도의 수행을 필요로 하는, 그런 지난한 것은 아니다. 또한 세속에 초연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고답적이고 신비한 것으로, 박제된 그 무엇도 아니다.


깨달음이란 낱말은 ‘깨침’과 ‘달음(박)질’로 나눌 수 있다. 달리, ‘그것을 알고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물론 깨침은 그것을 아는 것이고 달음질은 그것을 사는 것이 된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으로 지혜를 뜻한다. 지혜란 세계와 사물의 근원적 질서로써 보편적이며 타당성을 지닌 존재원리를 아는 것이다.

그 존재원리는 연기법이다. 그것은 들풀 한 포기도 안으로는, 수많은 인연들의 신세를 져야하기에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으며, 좁쌀만한 꽃 한 송이도 피울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밖으로는 꽃잎 하나가 피어오르거나, 민들레꽃의 깃털 하나가 실바람에 날릴 때에도 일파만파 온 우주가 진동하게 된다는 소식이다, 아울러 인연들의 관계로 비롯된 현상들은 그 인연이 다하면 변한다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산다’는 것은, 그 지혜의 완성이라 할 절대평온의 경지인 열반의 성취를 목표로, 자기정화를 위한 간단없는 정진에 사무치는 일이며, 동시에 타인에 대한 사랑과 공감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무한자비의 실행을 뜻한다. 지혜를 진정 획득한 자에게 이타심은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지만, 아무튼 지혜는 받아들인 그 진리를 수행으로 체화하고 실천에 옮길 때, 비로소 최대의 가치를 발휘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깨침’은 연기법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다. 그것은 붓다께서 2,600여년 전 이미 깨치신 진리로서, 앞서 발견된 그 진리를 찾아 자신을 지지고 볶으며 세상을 돌고 돌아보아야 ‘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인 것이기에, 이제와 새삼 각별한 수고로움 없이도 알 수 있는 기별이다.

그리고 ‘달음질’이란 그 깨침을 토대로 열반을 향한 수행의 여정에서, 더불어 자비 행을 확장해 가는 불교의 중단 없는 실천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자비의 실행은 끝나는 곳이 다시금 출발하는 곳이어서 ‘가도 가도 떠난 그 자리’이므로 불교실천도의 완성 아닌 완성, 궁극 아닌 궁극이다.

결국 깨달음이란 진리를 아는 지혜를 발판으로 모두가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자비의 살림을 그지없이 사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는 쉬우나, 살아내기는 실로 어렵다. 그것을 알기 위해 죽자 사자 걸을 일은 없다. 그러나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임에도 그것을 살기 위해 불교를 참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 오늘도 죽자 사자 걸어만 가는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해 떠오르는 쪽으로/ 중들은 해지는 쪽으로/ 죽자 사자 걸어만 간다/ 한 걸음/ 안 되는 한뉘*/ 가도 가도 제자리/ 걸음인데” (조오현 스님 시 ‘제자리걸음’ 전문. *한뉘: 한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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