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의 아름다우심

2012-03-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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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속의 부처

나직이 들먹이는 파도가 돌아누운 모래톱을 쉼 없이 쓸어주며 달래고 있다.

바닷가 둔덕에는 따사로운 봄볕에 실컷 취한 풀꽃들이, 형형색색 마음껏 피어올라 지천이다. 작은 골짜기를 따라 뜬구름 싣고 흘러내리는 개울물은, 졸음에 겨운 지 하염없이 옹알거린다. 산의 능선을 타고 하얀 들배꽃, 연분홍 산매화가 구름처럼, 꿈처럼 부풀었다.

조막만한 산새들은 휘날리는 꽃잎 되어 이리 날고 저리 날며 짝들을 희롱한다. 산새들의 갖은 교태와 간드러지고 자지러지는 소리에 다람쥐들은 덩달아 즐겁다. 살랑대며 감겨오는 실바람은 풋풋하고 달짝지근하여 엄청 버거운데. 어쩌란 말이냐, 꽃물 오른 춘정을, 이 흐드러진 춘삼월의 향연을.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싱싱하고 힘찬 생명력과 환희로 가득 찬 산하는,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되었건 ‘주어진 것’으로써 은총이다. 또한 그 무엇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드러남’이다.

인도의 시성 타골은 이 ‘신들의 정원’에서 피어난 경이와 불가사의를, 그의 시 ‘기탄잘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내밀한 장소에 숨어서 씨앗을 길러 싹트게 하고, 봉오리는 꽃을 피우도록 하며, 꽃은 풍부한 열매를 수확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정원에 피어 있는 꽃들이 기적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인은 아름다움과 생명을 지니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생명의 근원인 신의 무한한 사랑의 소산임을 찬양하고 있다.

한편 가톨릭대학 교수이며 저술가인 차동엽 신부는 어느 자리선가 신학생 시절을 회상하며, 수업 중에 “꽃을 본다/ 꽃의 아름다움을 본다/ 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고 표현한 최민순(1975년 선종) 신부님의 시상을 전해 듣고, 우주의 철리가 사통팔달로 뚫리는 충격을 받은 바 있다고 했다.

차 신부님 역시, 꽃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나무의 아름다움,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이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 고백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느님은 세상만유에 편재하면서 만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 원리’라고 규정지었다. 따라서 ‘꽃의 아름다우심’이라는 시구는 꽃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현시를 찬탄한 것으로써, 역동적 신관을 노래한 빼어난 시적 영감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비록 초월적 실재로서 신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불교 또한 일체만물에 내재한 공통된 존재의 원리로 ‘법’을 세운다.

법(Dharma)이란 ‘~을 유지시키다. 유지되다’라는 밑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법은 모든 사물을 ‘그와 같이’ 되게 하는 원리이며 눈치채야 할 진리로서, 각 개체는 독립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단지 인연과 조건에 의해 생성하고 소멸하며, 서로 의지하고 관계하면서 존재한다는 ‘연기의 법칙’이다. 그래서 이 법에 그 몸을 의탁하고 유지되는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현상은 각자 진리의 시현인 법신인 것이다.

삶과 죽음에 그토록 철저했던 법정(2010년 입적) 스님이 몸 벗으시기 전, 마지막 설법에서 남겨 놓은 ‘법 사리’이다.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새로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그 거룩한 침묵을 통해 듣기 바랍니다.”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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