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2012-03-05 (월)
크게 작게

▶ 고통은 신비다

누군가 인생을 ‘고해’라 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고통의 양이 바다만큼 많다는 소리일까. 아니면, 밀려오는 바다의 파도처럼 끊임없는 아픔들이 밀려드는 삶이란 의미일까.

한 세상 살다 가는 인생길에 저마다 고통없이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건만, 고통은 아무도 비켜가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왕가의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의 눈에까지 ‘생로병사’가 비쳤을까. 그리하여 그 분은 보리수 아래서 다년간 수행한 끝에 백팔번뇌에서 해탈하여 부처가 되었다 한다.

고통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고통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당사자와 그 가족만이 고통을 알 뿐이다. 남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전해져 온다면 세상에서 악한 일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얼마나 살기 힘들면 조국을 등지는 ‘탈북자’가 생겨날까.


잡혀서 되돌아오면 요사이 김정은 북한 권력자들은 3대를 처형시킨다고 한다. 그래도 굶어죽으나 총살당해 죽으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삶이 고통스럽기에 이판사판 탈북하는 사람들을 중국 공안들은 자기 아픔이 아니기에 다시 북한으로 돌려 보낸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처사인가.

그러니 절망으로 허우적거리는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고통은 우리의 잘못된 삶 때문에 올 수도 있고,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기도 한다.
담배를 끊지 않고 오래 피운 결과 폐암에 걸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고통은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기에 수용할 수 있다. 허나 지진이나 쓰나미 해일로 수많은 생명들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면 아무도 그 고통의 의미를 말해 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신앙인이든 아니든 끊임없이 한결 같은 의문을 던지면서 살아간다.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이 계신데 왜 우리는 아직도 고통과 질병으로 신음하며 살아야만 하는가’라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랑의 하느님께선 인간에게 결코 의미없는 고통을 허락하실 리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들도 자녀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고통’에 관한 책을 쓴 서강대 교수 송봉모 예수회 신부님의 말씀으론, 고통은 ‘신비’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병고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말씀과 아픔 없이는 우러러 뵐 수 없는 또 한 분의 얼굴, 그리고 고통 없이는 맛볼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적을 우리 인간은 절망 가운데서 때로 은총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앵두나무 한 그루조차도 추운 겨울 한 철을 꽁꽁 얼고나서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인류구원을 하느님 자신이 고통의 절정인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신 후에야 부활의 영광을 이루셨다.

우리가 지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고통 뒤에 맞이할 천상의 영복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당분간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오라 하신 것 아닐까. 지상의 고통이 끝나고 천상 영복을 맞는 순간, 그 고통마저도 가려진 은총이었음을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흐느껴 울 것을 아시기에 말이다. 그래서 고통을 신비라 한 것 아닐까. ‘사순절’을 보내는 우리가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저마다의 묵상과제일 것 같다.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