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디어 엄마

2012-01-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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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하는 삶

한국의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년이 되었다. 응급실-입원-퇴원-응급실. 떠나시기 전 이삼년 힘든 사이클을 반복하실 때마다 이번에도 잘 견디실 거야, 결국 이겨내시겠지, 하던 바람은 남아 있는 자식들의 희망일 뿐, 어머니는 어느날 퇴원하지 못하시고 병실에서 눈을 감으셨다.

나는 잦은 단기선교 스케줄로 비행기를 타고 대양을 건너고 대륙을 넘어 다녔지만 어머니를 찾아 한국에는 자주 들르지 못하였다. 병실의 어머니께 국제전화를 드리면 “일부러 한국 오지 말라우. 환자 봐야지. 의사가 신뢰가 떨어지문 되간?” 하며 말리셨다.

한 번은 파푸아 뉴기니 오지로 선교를 가있는데 선교본부에서 무전 연락이 왔다. ‘어머니 위독’. 한국 군의관 시절,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기에 한이 되었던 나는 그 길로 선교본부에서 특별히 마련해 준 경비행기를 얻어 타고 부랴부랴 한국으로 갔다.


비행기 안에서도 거의 달려가고 싶은 심정으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이틀만에 병원에 도착해 보니 어머니는 감사하게도 위급한 순간을 넘기시고 다시 안정을 찾으셨다.

그 다음에도 한국에서 연락을 받으면 달려나가 어머니를 찾았다. 오지 말라고 만류하시던 어머니는 조그맣고 기운 없는 손으로 나를 만지시며 말씀하셨다.

“집으로 데려다 달라우. 갑갑해. 막내야, 니가 날 좀 업어 개디구 집으루 가자우.” 그 간절한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시면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약기운으로 잠드신 어머니는 병원에서 내준 얇은 홑이불과 담요 아래서 아주 작고 납작해서 거의 부피가 느껴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지 불과 며칠 지난 어느 한밤중 어머니가 영영 눈을 감으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번 방문길은 1주기를 맞은 자식들의 추도모임이었다. 공항에 도착하는 길로 우리는 묘지를 찾았다. 공원묘원 맨 꼭대기.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들어선 공원 안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조용하다.

억새풀과 어울린 들풀들 사이로 무심한 솔바람이 한들거리며 지나간다. 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실 때 한국에 가면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 성묘를 하였고 어머니는 아버지 곁에 마련된 묘자리에 가만히 누워 아버지가 들으시기라도 하듯 중얼거리셨다.

“아이구… 자리가 펜안하구만요! 여봐여, 내레 여기 좋아요. 하나님이 오라구 부르시문 곧 올테야요.”


어머니가 편하다 하시던 그 무덤에는 일년 새 잔디가 많이 올라오고, 옮겨 심었던 나무들이 제법 자랐다. 나는 어머니의 무덤을 두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꽁꽁 묻고 그 위를 두 발로 잘 디뎌 다진 붉은 흙 아래 관 속에서 어머니의 작은 시신은 이제 자연의 순리대로 썩어, 재에서 재로 돌아갔으리라.

그러나 아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서 내 몸을 빚고 내 몸으로 나은 내 새끼들의 몸을 다시 빚는다. 그 자식들의 몸은 다시 또 그들이 낳을 자식의 몸을 빚어갈 것이다.

햇살이 따습게 퍼진 것 같아도 겨울바람이 옷섶으로 든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 형님이 앞장을 선다. 부모님을 곁에서 모시며 장남의 본분을 다한 초로의 사나이가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다.

나는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다시 무덤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번에는 두 팔을 벌려 무덤을 가득히 안아보며 가만히 입밖으로 소리를 내어 불러보았다. “엄…마…”

평생 많이 사랑하시던 막내아들이 “엄마!”를 부르는데 우리 엄마는 대답이 없다.


김범수 /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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