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낮은 데’로 임하소서

2011-12-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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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인의 신앙

어느덧 교회력으로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절’이다. 성탄을 ‘4주’ 앞두고 마음 안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영적 설렘이 그래서 좋다.
순수한 마음으로 살았던 옛날과는 달리, 요즘 사람들은 머리가 커져선지 대림절과 성탄절이 다가와도 ‘그런가 보다’하는 타성에 젖어 기대와 흥분과는 담 쌓은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대림절이 다가오면 괜히 가슴 설레며 정성 다해 ‘그분’의 오심을 기다렸던 옛 시절이 그립다.

‘대림절’ 하면 생각나는 성서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 스스로를 주님을 맞이할 ‘길’을 닦는 사람으로 드러냈다. “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은 눕혀져 곱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고르게 되는 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살았던 분이 바로 요한이었다.

대림절은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 마음 안에 ‘길’을 닦는 시기가 아닐까? 다시 말해 하느님이 우리 마음과 삶 안에 오시는데 방해되는 것들을 치우는 청소작업을 하는 때다. 그래서 대림절에는 마음을 깨끗하고 착하게 가꾸어야 한다.


주님은 더 이상 마굿간의 구유가 아닌, 우리들 마음 안에 ‘말씀’으로 매일 오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이 되어야만 ‘그분’이 우리 삶 안으로 쉽게 들어오실 수 있을까. 예부터 우리는 “심성이 고와야 복을 받는다”는 말을 즐겨 써 왔다. 심성이 곱다는 말은 바르고 착하다는 말 아니겠는가. 착한 심성을 지닌 사람은 그래서 하느님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는 모양이다.

평탄한 길을 만들기 위하여 깎아내려야 할 높은 산과 험한 언덕은 교만이다. 교만을 버려야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마음 안에 들어와 평화의 하느님이 삶 속에 탄생한다. 자기 생각과 판단만을 최고로 여기며 자기의 잣대로 남을 판단할 때는 불화와 미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흠 많은 인간을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 부족함마저 ‘보고 나니 좋구나’ 하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고, 스스로 다른 이의 부족함을 용납하는 ‘선한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마음의 길을 편편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닐까.

이와 달리, 메워야 할 깊은 골짜기는 마음의 상처나 열등감이다. 상처나 열등감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할 수 없고 다른 이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므로 사랑과 평화가 탄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를 쉽게 알아본 사람들은 목동들이었다. 자연과 벗하며 사는 순박한 심성 때문이었으리라. 선한 심성은 하느님과 통하는 지름길이다.

이 양선한 심성은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면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받아들이는’ 고운 마음이다. 그저 모든 것을 선하게 바라보는 심성이어서 남을 나쁘게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는 반대로 찰떡 같이 말한 것도 곡해해서 개떡 같이 알아듣고 사사건건 불화를 일으키며 미움을 품는 자들도 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헤로데 같은 사람들이다.

선하신 하느님은 예나 지금이나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 마음이 낮아질수록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를 깨우치는 것이 바로 대림절의 본질 아닐까.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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