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서비스가 최고

2011-10-19 (수)
크게 작게

▶ 선교하는 삶

작년의 일이다. 친구들과 한 이태리 식당을 찾았다. 들어설 때는 배가 고팠지만 식사 전 서비스로 나오는 빵 한 바구니를 올리브 오일에 찍어먹다 보니 본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어느새 배가 부르다. 젊고 명랑한 웨이터가 음식이 산더미처럼 담긴 접시들을 날라온다. 항복! 우리는 맛있는 파스타 접시를 포크로 뒤적이다가 결국 남은 음식을 싸가기로 했다. 잘 생긴 웨이터는 웃는 얼굴로 일회용 용기들을 가져다 주었다.

음식점에 가면 종종 남긴 것을 싸온다. 알뜰하게 담아가지고 오지 않았더라면 때로는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가지고 온 음식은 다시 데워서 역시 새 것일 때와 같은 마음으로 감사기도를 하고 먹는다. 어떤 한식당은 남긴 음식을 싸갈 수 없다고 벽에 써 붙여 놓았다.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앞서 갔던 이태리 음식점에서 정성껏 쌌던 도기 백(doggie bag)을 집에 올 때 테이블 위에 그냥 두고 나왔다. 나이 탓인가? 하루에도 자동차 키부터 코 위에 올려놓는 안경까지 열 두어 가지는 잃어버렸다가 찾았다가 하니….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다. 유난히 깔끔하고 맛있던 음식이 아까워서 다시 차를 돌려 그 식당으로 갔다. “남긴 음식 박스를 두고 갔다가 생각나서 그걸 찾으러 왔습니다.” 마침 테이블을 청소하던 웨이터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거요? 방금 쓰레기통에 내버렸습니다.”

에잇! 빠르기도 하지! 미운 녀석!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멀리서 상황을 파악했는지 잽싸게 매니저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새 것으로 다시 싸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내 앞에는 주방에서 새로 만든 뜨거운 파스타가 깨끗한 투 고(to go) 용기에 담겨 나왔다. 오우 예이! 두둑한 팁을 놓고 이후로 그 집 단골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서비스에는 소유권이 없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또한 상대를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졌을 때마다 사고 팔고 실행할 수 있다. 경제전문가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서비스란 주문에 따라 생산되는 특이한 산출물이다. 그래서 소비자에게 제공되어야만 비로소 생산이 끝이 난다.’

요즘은 거의 모든 일에 서비스라는 용어가 붙는다. 이태리 음식점에서 일어난 일처럼 한 자리에 있던 물건이 이리로 저리로 움직이느라 상황이 바뀌는 것도 서비스고 나의 신체적 조건이 예를 들면 더러웠다가 깨끗하게, 혹은 뭘 몰랐다가 알아지게, 비실비실했다가 반짝반짝 변하는 것도 서비스다.

의료행위도 서비스라 불린다. 최근 들어 LA 지역에서 의료서비스를 천박한 돈벌이로 전락시키는 일부 사례를 보며 분노의 감을 누를 길이 없다. 히포크라테스까지 갈 것도 없이 기본 윤리는 실종되고 환자에 대한 배려나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사랑과 서비스의 개념 대신 한 푼이라도 더 받아서 내 주머니를 불리겠다는 욕심 사나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가구배달 서비스, 가전제품 수리 서비스 등 물건의 상태를 바꾸는 서비스와 신체적 조건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의료 서비스와는 기본 개념이 다르다. 어느 국가, 어느 사회에서나 의사의 윤리강령 제 1조는 생명존중이다. 윤리가 사라진 서비스는 서비스가 아니다.


김범수
치과의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