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인 없는 편지

2011-05-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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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편지 묶음을 발견했다. 종이가 누렇게 변했다. 봉투에 씌어진 글씨도 펜 자욱이 주변으로 번져있다. 이메일 덕분인가? 이제는 손으로 우표를 붙여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거의 없다. 메일 박스에서 꺼내는 편지는 대부분 돈 내라는 청구서이거나 물건 사라는 광고뿐이다.

책장 맨 아래 서랍에 깔려 있다가 몇 년 만에 햇빛 아래로 나온 편지들은 모두 정성껏 손으로 주소를 쓴 사적인 것들이다. 잡다하게 어질러놓은 책장 앞에서 정리정돈하던 손길을 멈추고 방바닥에 주저앉아 편지를 열어본다. 감사, 격려, 위로의 글들이 담겨있다. 비록 봉투는 낡았어도 한 사람 한 사람과 맺어온 인연은 유일하고 소중해 빛바래지 않았다.

이게 뭐지? 열지 않은 편지봉투 하나가 툭 떨어진다. 보내는 사람: 앤디 김(가명)/ 보내는 사람의 주소는 우리 집이다./ 받는 사람: 미세스 김영자(가명)/ 받는 이의 주소는 중가주의 한 프리즌으로 되어있다. 수년 전 우리 집에 같이 살던 포스터 차일드, 앤디가 당시 수감돼 있던 자기 엄마에게 쓴 편지인데 그것이 배달되지 않고 우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엄마는 당시 한국으로 추방된 상태였다.


전달 안 된 이 편지는 홀로 어느 낯선 곳을 헤매고 다녔는지, 서너 달 만에 수신자 불명으로 다시 제 자리에 배달되었는데 이것을 받았을 때는 이미 앤디가 우리 집을 떠난 후였고 누구도 다시는 앤디를 보지 못했다.

앤디는 그때 10살이었다. 부부싸움 끝에 아빠는 집을 나가고 엄마는 그 자리에서 같이 죽자며 그에게 먼저 약을 마시게 했다. 이웃의 신고로 결국 경찰에 발견된 엄마는 수갑을 찼고 아이는 다행히 병원에서 살아났다. 소셜워커를 따라와 우리 집에 맡겨진 앤디는 늘 말수가 적었다.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을 했는데 급히 짐을 쌌는지 메고 다니던 백팩 하나와 엄마 아빠랑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그가 들고 온 짐의 전부였다. 시간이 흘러 앤디가 조금씩 마음을 열었던 대상은 제 또래였던 우리 막내였다. 앤디는 같은 방을 쓰던 우리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빠를 미워하냐구? 아니. 부모님이 싸운 이유가 나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공부도 잘 못하면서 속만 썩이고…. 그날 내가 새 운동화 사 달라고 조르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앤디는 그후 정부 시설인 그룹홈으로 옮겼다가 돈을 벌겠다며 어느 날 소셜워
커 몰래 시설에서 도망쳤다고 한다. 벌써 8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아이도 지금은 법적으로 성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앤디야, 이제는 읽어보아도 괜찮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앤디가 연필로 꼭꼭 눌러썼던 편지를 열었다.

-사랑하는 엄마, 며칠 전에 부활절이 지나갔어요. 예수님이 살아나신 날이래요. 아들이 죽은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니까 그 엄마가 얼마나 기뻤을까 생각했어요. 앤디도 안 죽고 다시 살아났어요. 엄마가 지금은 감옥에 있지만 그래도 내가 살아나서 기쁘세요? 소셜워커가 다시는 엄마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말해요. 안 믿어요. 우리 식구는 언젠가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전처럼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요. 그때까지 착한 앤디가 되어 있을게요. 엄마, 사랑해요. 많이 많이 보고 싶어요…… 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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