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폭설이 깨우쳐 준 이웃 정

2010-12-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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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 (법정 통역)
크리스마스에 모인 가족들을 막 떠나보낸 참인데 때맞추어 전에 없던 폭설이 퍼부어 뒤늦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법석을 떨게 되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해가 가지전에 한번 만나서 저녁을 나누는 동문 선후배들의 모임을 올해에도 월요일 저녁에 하기로 정했었다.그런데 크리스마스 다음날 토요일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일요일에는 온 동부지역에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폭설이 내려 이튿날 저녁 약속은 물으나 마나 취소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모임을 주선한 후배가 이런 일기 사정으로 일정을 변경한다는 연락을 의례 해오리라 생각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치울 궁리를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점심때가 되도록 연락이 없었다. 모임을 주선한 사람이 오후에 접어들 때까지 연락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참석할 수 없다는 연락을 하느라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은 이런 일기 사정 때문에 참석할 수 없다는 내 사정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월요일 아침에 눈은 그쳤고 도로는 각 타운에서 당연히 다 치울 터이고 각자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차고에 있는 차를 끌고 나오면 될 터이니 모임에 참석하는데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어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동료들은 다들 변동 없이 모이게 된 모양인데 나 혼자만 눈 때문에 나갈 수가 없다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눈 때
문에 꼼짝할 수 없는 내 사정을 설명하고 불참할 것을 알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서야 왜 나만이 이런 사정이 되었을까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선 이 친구의 생각으로는 차고에서 길까지의 눈은 당연히 누구를 시켜서 치우게 했을 터인데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내가 의례 직접 치우고 있다는 것을 놀랍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뒤늦게 이런 정황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아무튼 내일 아침에는 또 출근을 해야 함으로 비록 바로 길 앞에 차를 세워두긴 했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치워야 할 일이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아내와 둘이서 삽을 들고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우선 편지함 쪽을 차가 접근할 수 있도록 치워놓아야 우편물 배달을 해 줌으로 아내는 그쪽을 맡고 나는 차 있는 쪽에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언제 알아보았던지 지난번 앞 마당의 큰 나무가 쓰러졌을 때에도 대형 기계톱을 가져와서 도와주었던 이웃에 사는 젊은이가 눈 치우는 트럭타를 몰고 나타나서는 자기가 치울 것이라며 다른 이웃 청년 한명과 같이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와 아내가 이 일을 하려면 적어도 해가 저물 때까지는 걸렸을 일을 이 청년들은 불과 한 시
간 여 만에 거짓말처럼 말끔히 치워놓고 갔다. 물론 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돈을 줄 수도 없는 일이고 무엇으로 감사를 해야 할지 몰라 집에 있던 와인 한 병씩을 억지로 갖다 안겼다.

두어해 전 겨울에도 밤중에 눈이 내린 일이 있는 날이었다. 출근을 해야 하므로 평소보다 일찍 새벽 5시에 일어나 역시 길가에 세워 두었던 차 쪽으로 가보았더니 누군가가 이미 눈을 말짱히 쓸어놓았고 차의 창까지도 깨끗이 닦아 두었던 일이 있었다. 누가 이런 고마운 일을 해 주었을까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 이웃이라야 길 건너에 사는 70대 노인 밖에 없는 터여서 이때에도 한참이나 떨어진 이웃인 이 청년이 와서 해준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뉴욕에서 두어 시간이나 걸리는 이런 먼 곳이지만 이런 시골이웃의 민심에 반해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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