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인들은 본래 민족성이 ‘핫’하고 급한 모양인지 느긋한 면이 없다. 하지만 미국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얼굴을 붉히거나 고함치는 일을 보기 힘들다. 그리고 화가 치밀면 으레 그 자리를 피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말다툼이 벌어지면 당장 그 자리에서 ‘끝장’을 보려 한다. 더군다나 이성은 엎어두고 감정만 가지고 대든다.
차근차근 대화로 해결하려는 서구문화와 달리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한국식 사고방식 탓인지, 무조건 큰 소리부터 치고 본다. 그런 가운데 감정이 격하게 되면 아무 생각 없이 “죽여버린다”는 말을 예사로 하는 것 또한 한국문화다.
그러나 여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이다. 백인이 주를 이루고 사는 서구 문화권이란 말이다. 서구인들은 우리 동양인보다 이성이 더 발달된 민족이다.
그들은 매순간 생각을 말로써 표현하며 살아 왔기에 말은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이며 계획이다. 자연 이런 문화와 정서에 익숙한 백인들은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자기를 죽이겠다고 나오면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한인이 화를 내면서 별다른 생각 없이 자신의 분에 못이겨 “죽여 버릴 거야!”라고 하는 말을 살인의도가 담긴 ‘중범죄’로 간주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같은 이질문화권에서 살아가는 한인 이민자들에겐 그래서 웃기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재작년 발생한 일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전화통만 붙들고 있는 자식들이 한심해서 신세타령 겸 “아이고, 내 팔자야! 나 당장 죽어버리련다”라고 한 엄마의 말에 놀란 딸이 911로 전화를 한 때문에 구급요원들이 들이닥쳐 멀쩡한 엄마를 자살위험 환자로 취급해 정신병원으로 싣고 간 적도 있었다.
이제는 우리 한인들도 ‘대화’ 문화를 배워야 할 때다. 미국에 와서 살다 보면 말 못해서 죽는 사람은 결코 보지 못할 것 같다. 어려서부터 아무런 제약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맘껏 이야기하며 산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모든 학생들에게 자기 의견을 발표하도록 유도하거나 토론을 권장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생각이나 의견이 묵살 당하는 일도 없다. 그 때문에 ‘대화’문화가 발달하고 대화에 익숙해진다. 심지어 마이크 앞에서조차 움츠리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부러울 정도로 냉정하고 이지적이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백인들은 말다툼이나 화가 날 경우가 생겨도 얼굴을 붉히지 않고 곧잘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처럼 감정이 격해지면 안색부터 변하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 탓에 삿대질부터 해대는 일은 별로 없다.
따라서 상대방과 대화할 분위기가 아니면 시간을 벌기 위해 그 자리를 뜨는 것이 이곳 미국 사회다. ‘성질 내면 손해 본다’는 것을 그들은 화나는 순간에도 기억할 만큼 이성적이다. 이점이야말로 우리 한인들이 반드시 배워 익혀야 할 삶의 지혜 아닐까.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