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학의 가치를 찾아서

2010-12-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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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윤 태 (시인)
문학은 사람들 속에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데 문학 속에 사람 비슷한 허상만 있을 뿐 진짜 사람은 없고, 또한 사람들 속에 문학이 없으니 문학이 죽음 직전에 놓여 있다. 인간의 본질은 정서다.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 정서는 있으되 고정된 그 정서를 꺼내서 움직이게 해 비로소 인간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 문학인데 문학과 문학의 글이 사라지면 어떻게 변해 갈까? 한국에서도 그러한데 거칠고 삭막한 이민사회의 뉴욕에서는 별다른가? 뉴욕에도 글을 좋아해서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많으나 한국문인협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하루살이 잡지사에 청과 거래를 넣어 신인이라는 이름 석 자를 올려놓고 기성 문인이랍시고 자족하는 사람들이 거의 다다. 장송곡을 껴안고 행진하는 이 시대의 문학, 차라리 그 헛된 정열과 공허한 노력을 돈벌이에 눈을 돌렸다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급차나 집 한 채는 더 샀을 것이 아닌가!

한 편의 체제시가, 한 편의 운동권 시가 사회에 영향을 주는 시대는 불행하게도 이미 죽은지가 오래 되었다.유행가 가사의 위력만도 못한 현대의 순수 시(詩), 도색 잡지의 위력만도 못한 순수문학지, 인간정서를 내려놓고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한평생 문도의 길을 걸어 왔어도 답을 찾을 수 없으니 울고 싶을 뿐이다.“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는 우리는 작별을 해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따라다니던 현대적 멋쟁이 박인환 선생의 시 ‘목마와 숙녀’란 제하의 시 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방울 소리만 울리며 돌고 도는 회전목마이고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로 구체화 하고 있다.
인간을 버리고 떠난 문학은 주인이 떠난 회전목마와 다를 바 없고, 의식이 없는 인간은 식물인간과 다를 바 없다. ‘푸르트스’와 ‘조이스’에 의하여 정립된 의식의 흐름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버지니아 울프’는 전쟁이 가져다 준 정신적 중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서 삶을 마감했지만 “인생은 휘황하게 찬란한 광운이고, 의식은 처음과 끝을 끝까지 감싸주는 인간의 반투명체다” 하면서 인생을 값있게 사랑한 여류 시인이었다.

인생만큼 값진 것이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값진 것을 정립하고 세우고 인식시켜 주는 도구가 문학인데 문학이 죽고, 문학이 죽으니 인생이 보이지 않고, 인생이 보이지 않으니 인생도 죽은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문학을 하며, 또한 무엇을 찾아 어디를 가고, 무슨 목적으로 가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인간을 위한 문학은 결코 쉬운 학문이 아니고 인성의 바탕과 정서를 위한 문학은 결코 취미의 도구가 아니다. 문학의 절대적 가치인 의식을 새롭게 인식하고 문학도로서의 자세를 다시금 정립을 해야 할 것이다. 문학의 가치는 살아있는 인간의 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을 새롭게 발견하는 노력에 있어서 어떤 오류를 범하거나 인간의식의 순수성을 어지럽혀서도 안 된다. 문학의 길을 가는 노고의 참뜻은 문학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의식’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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