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해질녘

2010-12-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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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상, 깨달음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지는 태양, 그 장엄한 일몰은 언제 보아도 벅찬 감동입니다. 무소불위의 기세로 작열하던 태양도 늦은 오후가 되면 스스로를 태우는 불덩이로 떨어지고, 그 낙하하는 태양을 맞기 위해 바다는 들끓으며 수평선에서부터 황금빛 길을 냅니다.

하여, 마침내 태양이 수평선에 몸을 누이면 하늘과 바다는 온통 붉은 용암으로 맞닿아 일렁이다가 끝내 타고난 숯불처럼 사그라듭니다.

태평양 연안 어디서나 수평선에 해 지는 풍경은 흔히 불 수 있습니다만, 샌디에고에 있는 선셋 클립스(Sunset Cliffs)라는 곳에서 만나는 일몰은 그중 일품이라 하겠습니다.


5번 프리웨이를 타고 내려가다 샌디에고 중심지로 접어들기 전에 8번 쿠메야기 하이웨이를 만나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선셋 클립스 블러버드가 되고, 샌디에고 항구를 위곽으로 감싸주는 반도로 들어서게 됩니다. 곧 이어 깎아지른 해변이 나타나고 열린 바다를 향한 전망대들이 군데군데 있습니다.

해질녘 여기에 차를 멈추면 사막을 건너온 뜨거운 태양이 서녘 하늘을 붉게 태우며 수평선 너머로 몸을 던져 자결하는 일대 장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거대한 해탈의 감동이기도 하고 속절없는 몰각(沒却)의 슬픔이기도 합니다.

태양이 바다에 걸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소요시간은 3분이라고 합니다. 그 3분은 하루의 공간을 건너온 태양이 하늘과 바다 사이로 문을 열고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시간입니다. 그 거대하고 찬란했던 일출과 눈부신 하루의 시간에 비해 태양의 임종시간은 너무도 짧고 허무하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 한 해의 삶도 세모라는 시간의 수평에 걸리면 그렇게 간단하게 저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일 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 생존의 뜨거운 시간에서 문득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에 정신을 가다듬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한해살이가 이미 세모의 바다에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성공적이고 찬란한 것이었다면 세모의 하늘은 온통 황금빛으로 아름답겠지요. 하지만 대개는 아쉬움 속에서 저물게 마련입니다. 성취감보다는 상실감으로, 보람보다는 아쉬움이 깃듭니다. 그런 우리네 일몰은 광활한 수평선 아래로 황홀히 지는 것이 아니라 후회와 수심의 잔가지에 몸을 찔리면서 거친 산등성이로 피 흘리듯 쓸쓸히 지게 마련입니다.

어디 한해살이 뿐이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가는 이승의 한세상도 알고 보면 그렇게 황급하게 저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격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겠지만 결국은 모두 같은 곳, 이승의 아스라한 단애에 이릅니다.

그제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생몰(生沒)의 사이에 허락하신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나를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어쩌면 광활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찬란한 황금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시간의 소중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항시 떠나버린 열차의 승차권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동네 이발관 벽에 밀레의 만종 그림과 함께 붙어있던 표어 같은 글귀가 있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진부해 보이던 그 글귀가 나중에야 성경말씀(엡 5:16)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마저도 나는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의 진정성을 절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 세상은 가고 이승의 날들이 아쉬움으로 타는 낙조에 들어서서야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이 뇌성처럼 나의 존재를 때리고 있습니다. 이발소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상관없이 그 말씀이 우리의 꽃다운 삶을 흔들어 줄 때, 우리는 그 소중한 뜻을 일찍 알아들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깨달음의 시제는 항시 과거분사로 다가옵니다. 낭비한 시간이 아쉬워 오는 것은 또 한 해의 해가 저물기 때문일까요?


송 순 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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