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디 만들기

2010-12-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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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대나무 숲에 가면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하늘 향해 쭉쭉 곧게 자란 높다란 키, 줄기의 마디, 가늘고 빳빳한 나뭇잎들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시원한 속삭임으로 주위의 공기를 파랗게 물들인다. 그런데 왜 대나무 줄기에는 마디가 있을까. 혹시 곧게 자란 나무줄기에서 빗방울이 미끄러질까 봐 걱정을 하나.
어디 대나무만 그런가. 사람 세상에도 마디가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마디가 있다는 것일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길고 짧은 마디가 있단다. 100년은 한 세기, 30년은 한 세대, 365일.366일은 한해, 30일.31일은 한달, 24시간은 하루, 60분은 한시간...등이 마디라고 한다. 위와 같은 구분을 마디라고 말한다면 그럴 듯하다.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 구분이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만약 대나무 줄기의 마디가 빗물의 미끄러지는 것을 막는 것이라면 인류의 구분도 무엇인가 돕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게다. 하염없이 흐르는 세월에 어떤 구분이 없다면 피곤하다,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 새로움이 없다, 발전이 없다, 무미건조하다, 기록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금은 일년을 마감하는 연말 즉 세모이다. 누구나 무엇이거나 하나의 마디를 만드는 시기이다. 세모의 마디는 정신적, 물질적 빚을 갚는 일이다. 정신적인 빚은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낼 때부터 시작해서 연하장 보내기에 이른다. 물질적인 빚은 차용한 금액이나 물품을 반환하는 일이며 가계부와 재정보고서로 나타난다. 위와 같은 일들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쌓이기 마련이어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진행하게 된다. 학교에는 연말에 해당하는 학년말이 있고, 그 중간에 학기말이 있다. 이것들이 학교의 마디가 되는 것이다. 이 때가 되면 학습발표회, 작품전시회 등의 행사가 있고, 각 교과 담당교사의 평점과 관찰기록이 가정통신으로 나간다. 학기말이나 학년말은 학교의 수확기가 되어서 학생과 교사들이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성장의 즐거움이 따른다. 아울러 일반 사회 단체, 가정, 학교는 잡다한 사무 처리를 잘 하도록 노력한다. 그 이유는 새로운 출발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각자가 만들면서 지나가는 확실한 마디는 지속적인 성장 발달의 토대가 된다.


이 밖에 말이나 노래에도 마디가 있다. 한 마디 말이 중요함을 알리는 것으로 세모에 적합한 속담이 생각난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와 함께 말의 가치와 중요함일 알리고 있다. 말 한 마디와 돈 천냥의 가치가 동등한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 도와가면서, 서로 빚을 지면서 살 고 있다. 그 무거운 빚을 갚아가면서 사는 방법은 일상 생활에서 따뜻한 말을 주고받는 일이다. 노랫말을 기억하기 힘들 때는 이런 방법이 어떨까. 가사 내용을 이해하면서 각 소절 즉 마디마다 이어지면서 흐르는 음률을 기억하는 것이 한 방법이다. 노랫말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가락을 타고 흐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대나무의 마디는 세월이나 역사의 흐름, 학교나 단체의 학년말이나 연말 정리, 말이나 노래의 마디가 가진 뜻과도 연결되면서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 인류의 역사, 어디까지 발달할 지 예상하기 어려운 인류의 창의력,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표현되는 인류의 사랑은 ‘마디 만들기’로 탈바꿈을 한다.2010년 12월31일 한국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태평양의 파도를 타고 들려오기 전,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2011년의 새 공이 떨어지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지금까지의 ‘마디 만들기’ 작업 결과를 금고 속에 넣고 잠그는 것이다. 대나무의 마디와 마디 사이는 비어있다. 우리도 비어있는 마음으로 새해맞이를 하고 싶다. 텅 빈 속에 새해의 새 공기를 가득 채워서 새 힘을 얻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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