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현미경 사랑’

2010-12-1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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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일상, 깨달음

벌써 12월이다. 한해를 시작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기도제목을 적었는데 어느새 가는 곳마다 새해 달력을 건네주는 것을 보며 잠깐 마음에 쉼표를 찍어본다.

지난 일 년을 뒤돌아보니 아쉬움도 감사도 열두 광주리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더디 가던 시간이 요즘은 시속 55마일, 캘리포니아 프리웨이 제한속도보다 빨리 가는 것 같다. 유아기엔 그저 어머니 젖만 있으면 세상만사가 다 행복했었다. 그러다가 조금 커서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사회생활을 익히고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배우면서 친구 손을 잡는 일이 많아졌다.

여드름이 나고 목소리가 변해가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몸은 어른인데 아직 어린아이 취급받는 사실에 왜 그렇게 화가 나고 불만이었는지.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을 찾느라 고민도 하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뿔난 여드름도 사그러져 갔다. 스무 살, 청년기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호기도 부려 보고, 우주를 품에 안고 뛰는 꿈도 꾸었었다.


결혼을 하며 남편과 함께 시작한 인생밭 농사가 22년이 넘어간다. 뜨거운 사랑도 하고 자녀도 낳고 처음 경험하는 가슴 벅찬 행복도 가득하지만, 내 고집 내려놓고 상대방을 배려하며 끊임없이 격려해야 하는 어렵고 긴 마라톤 코스도 뛰고 있다. 자녀들의 성장만큼 인격과 사랑도 깊어지는 놀라운 은혜는 덤으로 얻은 보너스다. 특별히 이민교회 사모로서 사람을 섬기고 살피는 일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날마다 경험하며, 감사노래를 부르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안목’이다. ‘상대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갑자기 터진 사건보다 그 뒤에 감춰진 원인을 볼 수 있어야 깊고 풍성한 관계가 가능하다. 부부나 자녀, 가족이나 가까운 벗처럼 친밀한 관계 속에선 더욱 세밀한 관심과 사랑, 이해와 배려가 필요함을 느낀다.

망원경 사랑이 아니라 돋보기, 아니 미세한 세균까지 볼 수 있는 현미경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가정에선 가면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곳을 가렸던 무화과 잎새가 벗겨져 실체가 가감 없이 드러나는 곳, 그래서 아프기도 하지만 더 깊은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고마운 공동체가 바로 가정이다. 인내와 사랑 연고를 수시로 바르며, 힘들어도 한 번 더 눈감고 큰소리로 웃어넘겨 보자.

사랑은 상대적이다. 내가 웃으면 상대방도 웃는다. 우리 가정이 웃으면 이웃이 웃고, 서로 웃다보면 한인타운이 웃게 되지 않을까? 한인타운이 웃으면 LA가 웃고, 태평양 물살을 가로질러 웃음의 동심원이 조국에까지 전파되지 않을까?

웃음은 마음의 공간을 넓혀준다. 마음이 넉넉해지면 따지지 않게 된다. 웬만하면 따지지 말고 믿어주자. 아직 이해가 안 돼도 그냥 ‘그랬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만 있어도 싸움은 그친다. 겨울이 따뜻해진다.

기분 따라, 감정 따라 살 게 아니라 힘써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주고, 이해해 보자. 이제 곧 벅찬 새해가 다가오는데 언제까지 머뭇거릴 것인가? 오늘 결단하고 무릎을 꿇자. 내 자신에게, 이웃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


정 한 나
(남가주광염교회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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