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화를 기다리며

2010-12-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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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는 요즘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의미의 대강절을 보내고 있다. 매년 땡스기빙데이가 끝나면서 시작되는 이 대강절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교인들에게도 매우 뜻깊은 절기이다. 구세주가 이 땅에 다시 온다는, 즉 희망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이 12월은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다림이란 단어에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인내한다는 철학이 들어 있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들고, 여러 가지 면으로 고통이 있다 해도 끝까지 기다리고 버텨내야 언제고 다시 좋은 날이 오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볼 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평화가 아닐까. 불의의 기습공격으로 한국의 연평도가 졸지에 파괴되고 평화롭던 주민의 삶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평화가 과연 이 지구촌에 존재할까 생각해 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에서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가느니라” 하는 말을 남겼지만 평화는 우리가 아무리 추구해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 같아 보인다. 눈만 뜨면 세상은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미움과 질시로 가득차 온갖 범죄와 전쟁에서 하루도 벗어나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기독교나 불교, 천주교 등 모든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을 보면 최종적인 목적은 다 평화다. 기독
교만 해도 2000년이 넘도록 매주 주일날 목회자가 강대상에 서서 평화를 강론해 왔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도 지금까지 부르짖어온 게 사실상 평화다. 그만큼 오래도록 갈구해온 평화가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세계적인 평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유엔에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지만 사실상 이 지구상에는 평화가 없다.

평화라는 말 자체는 좋아도 실제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평화는 보통 상대적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 할 수 있는 평화는 과연 있는 건가. 실은 그마저도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고통속에서 헤맨다. 평화란 사람들을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가장 안정되게 살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이 평화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우선은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또 악의의 경쟁을 하지 않으며, 분수에 넘는 욕심을 갖지 않는데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가 없는 세상과 현실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불안의 연속이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불안의 연속이고 인간은 불안이라고 하는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어떻게 보면 희생물이다. 연평도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무참히 파괴된 것처럼 인간은 항상 알게 모르게 갑자기 들이닥치는 대로 겪을 수밖에 없는 불안과 더불어 살고있는 존재이다. 이제라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의식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이런 불안을 조금이라도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자에서 말한 것처럼 될 수 있으면 쓸데없는 욕심도 부리지 말아야 하고 시기와 질투도 하지 말아야 된다. 욕심은 되도록 자제하고 시기나 미움 같은 것도 마음에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비율에 따라서 평화는 오게 되어 있다. 평화는 분명히 있는 것인데 우리 스스로의 잘못으로 전자에서 말한 세 가지와 맞바꾼 것이다. 인간은 이 세 가지를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수 있다. 그런데도 단지 그 것을 내 것으로 갖지 않는 것 뿐이다. 법정스님이 설파한 무소유, 이는 무조건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의 주장에서 보면 필요한 만큼만 가지라고 하는 의미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찾아갈 때 광야에서 만나를 하루에 하나씩 주워 먹는데 이때 욕심을 부려서 두 개씩 줍는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는 썩어서 못먹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류에게 가르치는 평화의 한 방법일 것이다. 기다림의 대강절, 각자가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지구상의 평화를 꿈꾸며 기다려 보는 것도 대강절의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juyoung@koreatimes.com
여주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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