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 - 안녕, 어머니!

2010-12-0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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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어머니를 땅에 묻었다.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뒤에 어머니는 30년 동안 나를 그리워하며 덩그마니 커다란 아파트에서 도우미 아주머니를 데리고 혼자 사셨다. “언제 돌아오간? 남의 집 아들처럼 한국에 나와서 살라우!” 유학기간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늘 보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3년 만에 공부를 마치고 온다던 아들이 미국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개업을 하면서 어머니는 서서히 체념을 하셨다.

제각각 유학길로 떠나와 미국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보러 가끔씩 방문하실 때마다 어머니는 후렴처럼 말씀하셨다.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야, 자꾸 늙어가는데 언제 또 오갔니?” 듣는 자식들 마음을 저릿저릿하게 하시던 어머니는 그 뒤로 몇 번을 더 다니시다가 10년 전부터는 심장이 약해진 탓에 비행기를 타지 못하였고 종종 전화를 드릴 때마다 “보고 싶다, 언제 한번 오간?”을 되뇌셨다.


어머니가 급격히 노쇠해지면서 나는 밤에도 전화기를 머리맡에 켜고 잤다. 지난 봄, 어머니가 넘어져 응급실에 실려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것도 한밤중이었다. 다음날 당장 서울로 달려갔는데 그때까지 의식을 못 차리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왔다는 말에 눈을 뜨셨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어머니는 힘들게 입술을 움직이셨다. “환자들이 기달리지 않칸네? 어서 가보라우!”

지난 반년 사이에 검은 양복을 챙겨서 한국에 네 번 다녀왔다. 곤히 잠든 한밤중의 전화는 매번 무서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한번은 파푸아 뉴기니 오지로 의료선교를 가 있을 때였는데 위클리프 선교회 본부에서 ‘모친 위독’ 무전연락을 받았다. 그 길로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경비행기를 가까스로 전세 내어,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서울로 날아갔다. 미국에서 급히 나온 형제들까지 한자리에 모인 자식들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신 어머니는 놀랍게도 그 다음날부터 기력을 회복하셨고 다시 형제들은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뿔뿔이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갔다.

첫 입원 이후 몇 달째 병원에만 누워계시던 어머니는 하루종일 병실에서 찬송가를 들으셨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가까워~~.’ 그리고 떠나오는 날에는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레 집에 가구 싶어… 날 집에 데려다 주구 가라우!”

이번에도 한밤중에 울린 전화를 받으며 ‘별 일은 없을 거야’ 하고 나 자신을 진정시켰다. 바로 다음 주면 떠나기로 만반의 준비를 해온 아프리카 의료선교여행이 눈앞에 잠깐 겹쳐왔지만 어쨌든 당장 서울로 나가야 했다. 날이 새자마자 한편으로는 티켓을 구하고 한편으로는 예약 환자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하고 선교여행 팀에 연락을 취하고…. 검은 양복이 소용없기를 바라며 부랴사랴 공항으로 나가는데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운명하셨습니다.”

영안실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하얀 수의를 입으신 채 미동도 없이 차가운 철제침대 위에 누워계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아주 조그맣다. 미국으로 떠난 자식들에게 30년 동안 그립다, 그립다… 말씀하시던 그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눈 감으신 평화로운 얼굴과 뺨을 나는 양손으로 자꾸만 쓸어본다. 그리고 속으로 불러보았다. 엄마… 엄마… 엄마….


김 범 수(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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