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 - 놀부 마누라의 밥주걱 사건

2010-12-01 (수)
크게 작게
아마 ‘흥부전’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모든 유산을 독식한 욕심과 심술의 화신 놀부 형과 모든 것을 형한테 빼앗기고 헐벗음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서민들의 대변자 흥부 동생 사이의 여러 사건들을 해학과 풍자를 담아 이끌어가는 작자미상의 고대소설입니다.

책, 드라마, 또는 판소리를 통해서 수없이 읽고 보고 들어서 이제는 심드렁해질 만도 한 내용이지만 이 소설이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적절한 순간에 극적으로 펼쳐지는 통쾌한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이 결국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인생 역전 드라마의 원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통쾌함을 배가시키는 사람이 있으니, 주인공 흥부도 아니요, 형 놀부도 아니요, 바로 놀부의 마누라입니다. 처음 이 소설을 접했던 초등학교 시절 한 끼라도 얻어 먹을까 하여 주린 배를 움켜잡고 놀부 형님 댁을 찾은 흥부가 형수의 밥주걱으로 사정없이 얻어맞고는 얼굴에 붙은 밥풀을 허겁지겁 떼어 먹는 대목을 읽으면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놀부 마누라의 행위에서 참을 수 없는 울분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 당시 느꼈던 울분을 또 한 번 느끼게 하는 사건이 한국 공중파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구타사건, 방망이 한 대 100만원’이라는 제목의 방송이었는데 요약하자면, 40대 초반의 한 재벌 2세가 자신이 해고했던 근로자를 7~8명의 회사 임직원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갖은 모욕적인 욕설과 함께 야구방망이로 무차별 구타를 가하고, 10대는 한 대당 100만원 씩, 3대는 300만원씩 쳐서 2,000만원을 지불한 사건입니다. 재벌 2세 사장보다 10여세 연상인 그 근로자는 부당해고 철회를 위해 그동안 항의도 하고 애원도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고, 1년여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해지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서 자존심을 꺾고 회사 측 제안을 수용하기 위해 그 회사를 찾았다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뻗친 자세’를 강요받고는 그같은 일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놀부 마누라의 밥주걱 사건과 놀랍게도 너무나 닮았습니다. 가장 원초적인 생계를 담보로 비상식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치명적인 굴욕감을 준 점이 그렇고 그런 행위를 하고도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들이 오히려 은혜를 베푼 것처럼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까지 철저히 닮은꼴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전자는 소설 속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현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결론을 이미 알고 있고, 후자는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소설은 흥부 가족에게는 제비를 통해 대박을, 놀부 가족에게는 쪽박을 선사하는 통렬한 반전으로 읽는 내내 독자들이 느꼈던 울분을 일시에 해소시킵니다.

방송 말미의 고3 수험생 딸의 흐느끼는 인터뷰가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 넘은 오늘에서야 처음 아빠가 그런 일을 당한 것을 알게 되었고, 아빠한테 너무나 미안하고, 불쌍하고…” 아마 아빠는 공부하는 딸에게 방해가 될까봐, 고생하는 아내에게 걱정을 끼칠까봐 말도 못하고 한 달 이상을 홀로 속을 끓인 모양입니다.

이제 현실 속에서의 통렬한 반전을 기대할 차례입니다. 소설 같은 반전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상처받은 가장의 자존심이 회복될 수 있는 정도, 아니 울먹이는 그 딸의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을 정도의 반전으로라도 이 현실의 흥부전은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부회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