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예, 저는 신학을 합니다”

2010-11-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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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영 (목사)
오래 전 한국에서 살 때 어느 시골다방에 걸려있던 이조시대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농사에 싫증이 난 한 농부가 사공이 되고 싶어 강으로 가 배를 모니, 갑자기 동남풍이 불어닥쳐 배는 번번이 엉뚱한 곳으로 갔고, 뜻대로 되는 것이 없어 결국 다시 농사짓기로 마음 고쳐먹었다”는 내용이다.
밭에서 노는 사람 따로 있고, 물에서 노는 사람 따로 있다는 뜻인가. 시인될 사람, 그림 그릴 사람, 작곡가, 심리학자, 물리학자 등 보이는 현상을 잘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마치 눈으로 보듯 잘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존경하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선생들은 우리와 똑같은 공간 속에서 음을 찾아내 우리가 못하는 불후의 작품들을 만들지 않았던가. 태초, 에덴동산의 사과나무에서부터 지금까지 떨어지는 그 사과, 그 누구도 그냥 바람불어 떨어진다고만 생각했지, 뉴튼과 같이 만유인력 때문에 라고 생각한 사람 아무도 없었다. 또한 그 누구도 발견치 못한 하나님을 발견한 구약의 아브라함과 같이 또는 광야 가시떨기 속에서 가시나무 새처럼 속삭이는 세미한 신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모세같이, 각자 제각기 신의 음성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하다. 나도 유년시절 주일학교 때부터 “하나님은 누구인가? 어디 있는가?”하며 동무들과 객기 부리며 시작된 신학공부가 아직 끝나지 않고 어느덧 신학석사가 된 아직까지 이렇다할 신의 음성은 들려지지 않았다. 산 속에 가서 또는 텅 빈 교회당 속에서 울며불며 외쳐도 보았지만 메아리만 울릴 뿐이다.

그것도 “신은 죽었다”고 말한 목사아들 니체를 비난하면서 말이다. 그 오랜 세월동안 비싼 등록금 낭비하고 오늘도 막연히 저 파란 하늘만 쳐다보며 신의 음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한심한 지금의 내 모습이다. 그 동안 신학공부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남들같이 유명한 신학교수가 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변변한 신학서적, 또 그 흔한 설교집 한 권 발간해 보지 못했으면서 또다시 하다 그만둔 신학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처자식 고생시키며 신학공부 계속해야만 옳은가? 그렇다고 해서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야 모르겠지만 말이다.

비 내리는 이 늦은 가을 밤, 이런저런 시름 속에서 산책하다가 문득 옛날 신학공부 시작할 때 “얘야! 신학은 쑬 신(辛)이고 배울 학(學)자가 아니라고 하신 내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게 무슨 신의 음성이냐? 예수와 같이 가난과 고난 당하시며 신(辛)소리 거침없이 하시다 십자가 위에서까지 신(辛) 쓸개 포도주 받으신 주님을 배우는 것이 신(辛)학이구나.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나에게 고난받기 원하시는가? 뒤늦게나마 천장에서 울려오는 아버지의 설교를 듣고 있다 보니 어느덧 내 나이 위에 낙엽이 쌓이고 있었다. 내가 진작 아버지 음성을 들었더라면 허송세월하며 그 고상한 신학공부에만 매달려 있다가 우연히 얼마 전 이지면에서 초췌한 이 신학석사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 고마운 시인께 기대어 고백하고 싶다. “존경하옵는 시인님! 이 가을 저도 신(辛)학 농사 망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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