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 - 입 속에 인생이?

2010-11-0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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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오늘 갔던 환잔데요… 퇴근 후 밤 시간에 받는 환자들의 응급전화는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김 아무개에요, 아까 아침에 치료해 주셨잖아요. 처음 온 환자라면 이름으로 기억이 안 난다. 다시 묻는다. 어떤 치료를 받으셨나요? 앞니요? 아아, 사랑니요?

나는 대개의 경우 치아로 환자를 기억한다. 입 속에는 환자가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들어 있다. 어떤 사람은 시기적절하게 좋은 치료를 받아서 젊고 건강한 라이프를 살고 어떤 사람은 관리를 못해서 치아와 잇몸을 망가뜨렸다. 어떤 사람은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질높은 치료를 받았고 어떤 사람은 대충 힘겹게 살아온 형편을 짐작하게 한다.

얼마 전 디스커버리 채널에 이빨 아픈 사자가 출연했다. 사자도 이가 아플까? 이가 아픈 건 또 사람이 어떻게 아나? 사자가 아무리 밀림의 왕이요 맹수 중의 맹수라 해도 배가 부르면 공격하지 않는다. 그런 사자가 웬 일인지 미친 것처럼 약한 동물을 향해 달려든다. 이가 아프기 때문이다. 동물의 치아만 치료하는 전문 수의사의 진단이다.


카메라는 사자의 입 안을 비춘다. 물론 마취주사를 놓아두었기 때문에 이 숫놈 사자는 늠름하던 갈기털이 헤어밴드 묶은 것처럼 단정히 뒤로 빗겨진 줄도 모른 채 기절한 듯이 자는 중이다. 과연 어금니 하나가 부러져 있다. 사람도 치아에 금이 가면 고통이 만만치 않다.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 사자 환자는 너무 단단한 것을 씹다가 어금니에 금이 간 것 같다고 의사가 말한다.

신경치료도 필요하다. 담당 전문의는 수술을 시작한다. 수술기구들이 나의 오피스에서 쓰는 것보다 몇 배는 크다. 그는 자주 동물들의 충치를 치료한다. 치료 부위를 메울 때 건설현장의 콘크리트 개는 것 같을까? 나는 혼자 상상을 한다.

몇 년 전에는 애리조나에서 애완용 생선의 이빨 치료가 있었다. 생선 주인은 크리스 피쉬케라는 사나이다. 크리스가 이뻐해 마지않는 생선은 복어다. 그는 날마다 사랑하는 복어가 헤엄치는 어항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오늘 아침에는 무얼 먹고 싶니, 복어야? 나는 햄과 버섯이 든 오믈렛을 먹으려고 해. 너도 같이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크리스가 대화인지, 일방적 독백인지를 마친 후에 카메라는 가엾은 복어의 이빨을 클로즈업 한다. 히히히, 정말 웃긴다. 앞니 두 개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뻗어 나왔다. 만화 캐릭터 벅스 버니가 홍당무를 씹던 이빨보다 열 배쯤 길다. 저런 이빨로는 먹이를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양가가 너무 높은 먹이를 계속 주다보면 이빨이 비이상적으로 자랄 수 있으니 다이어트를 시키십시오” 하고 복어 의사가 주의를 준다. 수술은 비교적 간단하게 끝났다. 마치 길어진 손톱을 깎듯이 복어의 이빨을 특수 기구로 잘라내고 끝을 갈았다. 복어가 아플까봐 조바심이 난 크리스에게 의사는 별로 아픈 수술이 아니라고 위로를 해 준다.

나는 치아로 환자를 이해한다. 경제적 형편을 짐작하고 자기관리 능력을 가늠한다. 입 속에 인생이 들어 있다. 누운 환자의 입 속에서 간혹 눈물겹게 고달픈 인생을 본다.

아아, 지치고 아픈 인생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삶을 나는 살고 싶다.


김 범 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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