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역사의 증인, 황장엽선생 지다

2010-10-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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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구(탈북난민보호미주협의회 회장/목사)

오호 통재라, 한국분단의 비극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 일을 이룰 일꾼은 지고 말았도다. 북한이 적화통일을 목표로 27세의 김정은을 대장으로 임명하고, 당당한 군사력을 과시하며 3대 세습을 만천하에 알리는 잔칫날에 북한의 김정일정권을 붕괴시키고, 북한인민을 구하고자 남한에 왔던 황장엽선생이 향년 83세에 심장마비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의 북한주민에 대한 민족애와 독재와 군국주의를 붕괴시켜야 인민이 산다고 외친 정의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다. 황장엽선생은 1997년 2월에 중국에서 한국정부에 망명을 신청하였고 당시 김영삼대통령의 적극적인 외교노력으로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 김덕홍총회장과 함께 한국에 왔다. 그는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대한민국만세를 외쳤다. 북한에 있는 동지들에게는 5년만 기다려다오, 반드시 좋은 날이 오게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떠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의 신은 그를 돕지 않은 것 같다.

97년부터 10년 동안 그는 뒷방 노인처럼 취급되었고 김정일이 보낸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위협까지 당하면서 그의 심장은 썩을 대로 썩어가고 있었다. 황장엽비서는 1997년 2월17일 망명직후 베이징 한국총영사관에서 아내에게 이런 유서를 썼다고 한다. “나 때문에 당신과 사랑하는 아들, 딸들이 모진 박해속에서 죽어가리라 생각할 때 내 죄가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 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오,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주기 바라오,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저 세상에서라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소,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한 내가 얼마나 목숨을 더 부지할지는 알 수 없으나 여생은 오직 민족을 위하여 바칠 생각이오,”


가장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사지로 몰아 넣으면서까지 민족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황선생은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과 온가족을 다 희생시켰다. 불행히도 13년 8개월에 걸친 그의 생활은 비참 자체였다, 역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혁명가는 10년 동안 남한의 무지한 지도자와 정치인들 때문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황선생께서 나에게 보낸 민족통일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의 좌우명은 개인의 생명보다 가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 민족의 생명이 더 귀중하고, 민족의 생명보다 전 인류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것이다. 아직 인류는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완전히 결합되지 못하였다. 우리의 당면 과업은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민족적 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와 동지들의 오늘의 행동을 규정하는 사상적 입장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통일시키려는 방책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였다. 2006년 10월에 출판한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도 참석하였다.
북한이란 군사통치, 독재통치하에서는 민족번영, 공생, 자유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기에 사랑하는 온 가족을 사지로 몰아 넣으면서도 남한 땅에서 이루어 보겠다고 찾아온 혁명가는 끝내 그 뜻을 당대에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갔다,
그러나 그의 애족 애국심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한국에온 2만명의 탈북자들이 빗방을이 되고 이 빗방울이 강물을 이루고 이 강물이 바다를 이루고 이 바다가 북녘땅을 쓰나미로 덮을 때가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그때 황장엽선생이 가슴에 품었던 씨앗은 꽃으로 만발하고, 그 고귀한 희생의 뜻은 영원히 한민족 겨레의 가슴에 새겨질 것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만나고 영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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