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자연과 인간의 삶

2010-10-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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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날씨가 제법 서늘하다. 가을의 중턱에 들어섰나 보다.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어김없이 재연되는 자연의 모습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이 제각각 다르나 자연은 틀림없이 그 모습을 인간들에게 보여준다.사람도 마찬가지다. 아기 때부터 청년 때까지는 봄에 해당된다. 청년시절부터 중년까지는 여름에 해당된다. 중년기부터 장년기까지는 가을에 해당된다. 장년기부터 노년기에 이르면 겨울로 접어든다. 겨울에 해당되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만 한다.사람에게 나타나는 계절 같은 모습은 우리를 교만하지 않게 한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뛰던 청년기를 지나 눈 깜짝할 사이에 겨울 같은 노년기에 다다르는 것이 인생이다. 돌아보면 먼 길 같다. 그러나 삶이란 그리 멀게 돌아왔거나 오래도록 이 땅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여 아이들 뒤치다꺼리 하다 보면 중년기다. 아이들이 커서 결혼할 때쯤 되면 장년기 후반이나 노년기 초반에 다가선다. 아이들 결혼하여 손자 낳는다. 손자들이 커서 학교에 들어가 그들이 청소년기가 되면 노년기의 중반에 들어선다. 금방이다. 변화하는 세월의 모습 속에 자신의 늙음을 거울 앞에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인생의 계절이지만 각 사람에게 다가오는 계절의 모습은 천차만별로 다르다. 누구는 평생 봄날 같은 인생을 살며 늙지 않을 것 같다가 세월이 차면 삶을 뒤로 한다. 어쩌면 하늘로부터 큰 복을 받고 태어난 생이다.


어떤 사람은 평생을 겨울같이 살다 가는 사람도 있다. 지질이 못난 인생같이 부모 잘못 만나고 아내, 남편 잘못 만나 고생 고생하다 간다. 엎친 데에 덮친 격으로 자식 복까지 없어 있는 자식마저 마음고생 물질 고생을 시킨다. 그러다 갈 때에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슬픈 생이다.하지만 봄날 같은 인생이었든 겨울날 같은 인생이었든 사람이 삶을 마감할 때엔 하늘은 모두를 품어 안는다. 그것도 따뜻이 공평하게, 그리고 평안한 곳으로 인도한다. 평안한 곳이란 고생과 슬픔이 멈추어 있는 곳이다.언젠가 산에서 노루 한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노루는 큰 놈이었다. 한 겨울, 눈이 내려 온 산이 하얗게 덮여 있을 때에 노루는 길가에 누워 있었다. 노루의 죽음에 어떤 연유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한 주에 한 번씩 산에 오를 때마다 노루의 모습은 점점 바뀌어 갔다. 산에 사는 육식하는 들짐승들이, 혹은 하늘을 떠다니는 독수리나 매들이 숨이 끊어진 노루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노루의 몸통은 온전한 곳이 없이 찢겨지기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난 후 보았을 때엔 노루의 뼈들만 앙상하게 남아 뒹굴고 있었다. 또 몇 주가 지난 다음에는 그 뼈들마저도 없어지고 노루가 죽어 있던 하얀 눈 덮인 곳은 평온하기만 한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금년 여름 그 자리에 갔을 때에는 언제 노루가 죽은 자리였나 싶을 정도로 푸른 들풀들이 풍성하게 덮고 있었다.

자연으로 되돌아간 노루의 몸이지만 먹이가 없는 한 겨울 짐승들에게 그 살을 먹게 하여 그들을 배불려 주었으니 노루의 죽음은 많은 짐승들의 양식이 되었다. 그러니, 노루는 죽은 것이 아니라 노루의 고기를 먹은 뭍짐승들의 피와 살과 함께 지금도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쓸쓸히 길가에 누어 숨이 끊어져 있던 노루의 생명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살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때를 맞추어 계절이 바뀜은 자연이 인간에게 내려주는 큰 복중의 복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만큼 큰 축복도 없다.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식도 하늘이 이어지게 한 큰 인연임엔 틀림없다.

내가 고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은 어쩌면 모두 다 내 탓임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내 복이 거기까지임을 감안해야 한다. 부모와 남편, 아내와 자식이 나를 고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겨울 같은 인생을 살았어도 태어나 산 것만큼은 복인 것이다. 100도를 오르내리던 여름의 뜨거움은 가고 가을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산에는 단풍이 아름다워진다. 정직하게 나타나는 자연의 모습이다.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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