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코리안 퍼레이드와 서재필

2010-10-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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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종(목사)

연례 코리안 퍼레이드가 우리 한인이민사회의 성장과 함께 해마다 더 커지고 있음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이를 주최하는 뉴욕한인회와 주관하는 한국일보에 감사한다. 우리 한인 이민들에게 긍지를 주는 코리안 퍼레이드를 30년 전에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처음 시작한 한국일보사의 비전과 공헌을 찬양하는 바이다.
코리안 퍼레이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한국일보는 그동안 초심을 잃지 않고 많은 어려움과 역경을 딛고 줄기차게 이 행사를 치러왔다. 그 결과 코리안 퍼레이드는 한인들에게 커다란 자긍심을 안겨 주었으며 2세들에게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주었다. 뿌리의식과 정체성도 심어주었다. 한인사회의 힘과 저력, 화합과 단결을 상징하는 코리안 퍼레이드는 앞으로도 계속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매년 코리안 퍼레이드가 개최될 때 마다 지금부터 91년 전, 1919년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 박사가 주도했던 ‘코리안 퍼레이드’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 그리고 그때의 한인사회와 지금의 이민사회를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 같이 큰 차이가 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그때 퍼레이드는 나라없는 민족의 설움을 안고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으며 삼일만세운동에 호응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한 비장한 행진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자랑스러운 우리 ‘코리안 퍼레이드’의 원조 가 아니겠는가?


그때 이 퍼레이드를 주도했던 서재필 박사는 이미 55세였다.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나라를 개혁하고 조국의 미래를 바꿔 보겠다고 갑신정변을 도모했던 젊은이, 18세에 장원급제를 한 투철한 머리에 장신의 체구와 뛰어난 용모의 소유자였던 서재필. 오직 민족을 사랑하며 조국의 장래만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혁명에 뛰어 들었던 그는 소용돌이치는 무자비한 이조 말 한국 역사의 무참한 희생양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모의 주역으로 몰린 그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들을 ‘삼족을 멸하는’ 무자비한 형벌로 모두 잃게 되고 구사일생 망명의 길에 올라 일본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오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귀한 그릇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니 석탄재벌 홀렌박을 ‘천사’로 보내어 그를 구제하고 고등학교로부터 미국의 고등교육을 받게 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의사가 되고 창업가가 되어 ‘필립 제이슨 컴퍼니’ 라는 문구점을 대대적으로 경영하면서 필라델피아 주류사회에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의 능력과 주류사회와의 ‘커넥션’은 3.1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개최한 최초의 한국인 대회를 열고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대회에는 약 150명의 한인들이 참가했는데 그들이 시가행진을 할 때 필라델피아 시의 밴드와 기마경찰이 동원되었고 수많은 시민들과 지도자들도 합세했었다고 한다.

그날 퍼레이드에는 이승만박사와 정한경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같이 행진했으니 그들이 오늘의 뉴욕한인사회와 자랑스러운 코리안 퍼레이드를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놀라고 감격스러워 할까 생각하며 지나간 우리 민족의 선구자들을 기리며 언젠가 오고야 말 ‘통일 한국의 퍼레이드’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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