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병아리 같은 손자

2010-09-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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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길 (수필가)

여름방학이라 손자들이 캠핑 학교에 다닌다. 아침 출근하는 제 부모들이 태워다 주면, 픽업하는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 몫이다. 12시반에 작은 녀석을 집에 데려다 놓고, 다시 3시 반엔 큰 녀석 차례다. 이러고 나서 애들 목욕시키고, 저녁 먹이면 하루 우리 일과가 끝나는 셈이지만 또 아이들 퇴근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집에 가면 팍 퍼지고 만다. 하루는 세탁소를 하는 동네 한인 아주머니와 손자들 키우는 말이 오고 갔다. “나 몰라라 하
는 할머니들이 많다는데, 손자들 보살피느라 얼마나 고생하느냐며?” 위로의 말을 나의 아내에게 해주었던 것이다.

“너 크면, 할머니 잊어버릴 꺼지?”하고 손자녀석에게 물었더니, “아니야! 내 가슴에 영원히 묻을 꺼야!”라며 이제 막 7살 난 녀석이 가슴을 치며 대답하더란 말을 들은 세탁소 아주머니와 방학기간에 부모를 돕고 있는 약대생 큰 딸은 주르르 눈물을 보이더라는데…. 어느날 부모와의 약속하고는 전혀 딴 판으로, “ 엄마, 임신 납시요…”라며 갈색 머리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 아들녀석의 업적이 있었기에 ‘네까짓 외손자가 뭘 알겠
나’ 싶어 장난삼아 물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가슴에 묻겠다는 말을 듣고, 옛날 고생하던 만감이 교차하여 같이 눈물을 삼켰다는 집 사람의 말이다.


손자들 키우는 것이 자기 자식 키울 때보다 더 안쓰러울 때가 많다. 이제 4살 난 작은 손자는 물을 마시면 목 기능이 잘못됐는지, 물이 폐로 들어간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신경을 곤두 세워야 한다. 물을 못 마시게 하니까, 처음엔 물 달라고 냉장고에 매달려 울고 불고 하는데, 정말 두 눈뜨고 볼 수 없는 비극이었다. 의사의 처방에 따른, 가루를 탄 물이 제 맛이 안나니까 ‘물, 물…’하며 애걸했던 것이다. 3일만 물 안 마시면 어찌 될 것인가, 무서운 생각이 든다. 차츰 자기 처지를 감지한 손주녀석은 순수하게 의사 처방을 잘 따르고 있기에 요즘은 마음을 놓으면서도 꾸준히 주의를 하고 있어야만 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하루는 캠핑 수영장에서 어떻게 노나 보려고 수영장으로 내려가는데, 타월을 몸에 둘둘 말고 교실로 걸어오고 있는 작은 손자녀석을 보았다. 재미있게 잘 놀았냐고 물으니까,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없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교실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뒤로 나를 돌아보는 것이 구원의 눈빛이었다. 손자녀석의 ‘폐에 물이 들어가서…’ 이 말을 들으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부정 탈까 봐 무엇이라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늘 가슴앓이를 하면서 조심히 작은 손자 녀석에게 오늘도 다가가야 한다. 불면 꺼질까, 만지면 터질까… 이렇게 조심스러울 수가 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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