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티스(Matisse)의 바이얼린을 듣고 싶다

2010-09-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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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옥(MoMA 근무)

지금 MoMA에서는 마티스가 과격한 변화를 시도한 1913-1917년 사이의 작품 12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기를 페인팅은 안락의자처럼 편안해야 된다고 했지만 이 전시는 계속 고뇌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표현주의가 아닌 그의 순수하면서도 심오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화사한 햇볕과 강한 색채로 캔바스를 가득 채웠던 그의 수법이 1912년과 1913년 모로코를 다녀오면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간결해진 선, 겹겹 두꺼운 페인트, 큐비즘의 시도...그때 그는 큐비즘(cubism)의 창시자 피카소와 우정을 쌓으며 존경했다.

세잔느(Cezanne)가 마티스에게 준 영향 또한 대단했다. MoMA 첫 번째 전시장 입구에 세잔느가 1879년에 그린 조그만 캔버스의 ‘세명의 목욕하는 사람’이 걸려 있다. 마티스가 구입한 그림이다. 세잔느에 영향받은 누드를 많이 그렸지만 그는 또한 프랑스 전통인 전원 속의 누드 역시 많이 창조해 했다. 그중 ‘푸른색 누드’는 피카소로 하여금 그의 걸작품 ‘아비뇽의 여
인들’을 다시 손질하게 만들었다는 일설이 있다. 마티스는 1차대전중 이사도 몇 차례 다니며 힘든 생활을 하면서 마치 전쟁과 큐비즘에 도전이나 하는 듯 검은색, 회색을 많이 쓰는 동시에 작품조성도 기하학적으로 펼쳐 나갔다. 이사할 때마다 마티스는 피아노를 먼저 챙겼다. 아들과 함께 레슨을 받았는데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아들은 연습을 안할 수가 없다고 했다. 피아노 앞의 아들을 그린 걸작품 ‘피아노 레슨’역시 이번 전시에 포함되어 있다.


마티스는 초상화를 많이 창조해 냈다. 아멜리는 자신의 초상화를 위해 100번 이상 매일 앉아있었는데 드디어 완성된 그림을 보았을 때 그녀는 울고 말았다. 마티스가 혼신을 넣어 그린 우아하게 앉아있는 그녀의 얼굴은 더이상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전 같은 감정이 흐려지고 있을 때였다. 열심히 돌보던 스튜디오 업무도 딸 마그리트에게 맡기고 있었다. 첫째딸 마그리트는 실상 마티스의 다른 여인에게서 태어났으나 곧 마티스 집으로 데려온 뒤 두 부부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성장했다. 둘려있는 짧은 목거리가 눈에 띤다. 기관지 수술로 목에 구멍을 뚫어야 했던 마그리트는 항상 목이 높은 블라우스나 까만 벨벳 리본을 착용하고 있었다.

또다른 초상화의 모델로 이본 랜스버그라는 19세 소녀를 소개받았는데 너무 못생기고 수줍고 그래서 불행한 이 소녀를 보고 마티스가 말했다. 너는 목련꽃 봉우리를 연상시킨다. 마티스의 붓끝으로 이 봉우리는 활짝 피어났다. 마스크 같은 얼굴에 텅빈 까만 눈. 약간 비정상적인 몸의 구조를 화폭에 담고 난 뒤 마지막으로 감싸듯 긁어 내려갔다. 마치 목련꽃 화관이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듯 이본은 이렇게 피어났다. 이 초상화는 단번에 대단한 평판을 얻었다. 그 뒤 이본을 모델로 한 프린트도 많이 만들어냈는데 목련꽃 화관이 늘 동반했다.

마지막 전시실에는 ‘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들’ 1909-1910년에 시작하여 2년뒤 계속하며 1917년에 완성된 회색, 청색, 분홍색의 마치 나무기둥같이 보이는 이 여인들의 그림은 Modernist Masterpiece의 대표작품중 그 하나로 뽑히고 있다. 힘들고 피곤할 때, 짜증날 때, 그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매일 바이얼린을 켰다. 3개월의 작업이 끝난 뒤 마티스는 몹시 쇠약해지며 병이 들었고 마르쎄이로 휴양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휴양을 떠나며 가족에게 말했다. 나는 오직 내 바이얼린만 갖고 갈 것이다. 그의 바이얼린은 어떤 소리를 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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