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름 가고 가을은 오는데

2010-08-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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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8월이 어느덧 중턱에 와 서 있다. 날씨의 더위보다도 더 더운 불경기의 더위, 아무리 부채질을 해도 마음이 시원해지지 않는다. 그런 답답한 더위를 견디며 그래도 오늘까지 왔으니 이루었던 이루지 못했던지 가지고 있던 천개의 ‘바램’과 만개의 ‘간절함이 여기까지 오게 된 우리들의 힘이었다. 8월도 중순이 되니 잎새 무성한 여름산도 가을 산이 되려고 가을에 맞는 새 옷을 준비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따뜻했던 여름 강도 가을 강이 되려고 새삼 파란 얼굴을 씻으며 흐트러졌던 몸매를 정리하고 있다.산은 하늘 높은 정상을 향해 오르다가 그 노력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알면서부터 오르던 키를 포기하고 제자리에 서 있고, 내려가면 오히려 큰 바다를 이룬다고 잔웃음을 웃으며 흐르는 강
은 갈수록 그 모습이 여유롭고 폭이 넓어진다. 버는 대로 잘만 투자하면 부자가 되는 간단한 방법을 알면서도 투자하지 않고 소비하면서 허비하는 쓰임새의 습관이나, 투자를 하고 싶어도 투자가 되지 않고 꺼내 쓰기만 해야 하는 인생은 날이 갈수록 그 모양이 허름하고 가늘어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수확을 할 열매가 별로 없는 허전한 가을, 풍족하지 않은 공양을 들고 시름에 잠겨오는 사람을 바라보며 입가에 담는 절 집의 찬 미소는 직선으로 등이 곧은 부처님의 동정어린 미소 같다. 이만하면 성공을 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나, 성공과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고 온 힘을 다하면서 도시의 길가를 사장삼아 하루를 넘기는 사람들의 눈을 보면 보이지 않는 피가 고여 있다. 삶의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보아 와서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민의 땅에서 많은 횟수로 넘긴 미국의 길은 그 경사가 만만치 않게 높고 가파른 길이었다.


한민족의 이민사는 우등생이라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많지만 얼마나 많은 힘이 들었던 길을 걸었던지 미국의 경제악화 앞에서 조로(早老)의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한민족 이민사회의 얼굴 모습,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고, 그 한두 달 앞에 품을 활짝 벌리고 있는 늦여름은 익어가는 열매를 바라보며 수확의 준비를 재촉하는 즐거운 시기인데 가을이 보여도 힘없이 맥을 놓고 걱정을 긁는 사람들만 수없이 많이 보인다.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답답한 질문, 최고의 부강 국인 미국의 경제가 왜 이렇게 어려워지고만 있느냐고 해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수확의 가을에 묻고 싶었다. 겉모양은 그럴 듯하게 좋지만 내용 없는 미국의 길을 바라보며 가는 것이 우리들의 길이며, 아무리 키를 늘려도 키가 작은 잡풀로 닿을 수 없는 하늘만 바라보며 가는 것이 우리들의 길이냐고 묻고 싶었다.

최저의 생활 밑은 빈곤이라 했던가? 병만 없으면 건강하다고 했던가? 대학만 나오면 앞날이 보장된다고 했던가? 결혼을 하면 행복해 진다고 했던가? 주머니에 용돈이 있으면 가정생활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가?
처음에 도착한 미국의 공항에서 느꼈던 신혼마차의 흥분 같은 설렘은 다 가시고 눈을 감지 않는 카메라의 왕눈같은 렌즈처럼 눈 감을 여유조차 없이 피곤해야만 그나마 작은 길이라도 찾아 갈수 있는 이민의 길, 얼마나 지쳐있으면 아직 중년도 안 된 이민사회가 벌써부터 조로(早老)의 현상을 보이는지...
여름은 다 가고 가을은 오는데 순례자도 아닌 우리에게 수확할 것 아무 것도 없어도 말없이 견뎌내는 이 땅에서의 순례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그저 아무데고 묻고 싶은 막바지 여름의 하루하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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