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광복 65주년에 태어난 아기

2010-08-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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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우리 집 벽난로 위의 벽에는 이범석 장군의 붓글씨 액자가 걸려 있다. 나의 아버지를 삼국지연에 등장하는 중국고대의학의 명의 화타와 같다는 글이다. 평범한 시골 개업의사인 아버지를 의학윤리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동방의 화타에게 비교한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나의 어머니는 이범석장군의 필체는 마치 만주 벌판의 칼바람을 가르며 말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막힘이 없다고 하였다. 그의 붓글씨는 당대에 손꼽히는 명필이었다고 한다. 1920년 이범석
장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전투부대를 진두지휘, 울창한 산림이 하늘을 가린 산골짜기에 매복하여 일본군 정규군을 격파한 항일투쟁사의 주역이다 그는 광복 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초대국무총리, 국무장관을 역임하고 반공체제인 민족청년단을 조직한다. 그러나 정치의 진흙탕 속에서 핵심 요직에서 밀려나 버린다.

나의 어머니는 만주의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 무관학교를 설립한 집안과 친척관계였다. 이런 인연으로 이범석은 노년에 나의 고향 충청도에 꿩 사냥을 즐기면서 우리 집에서 며칠씩 묵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청진기를 목에 걸고 환자를 진료하며 단조로운 생활을 이어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뻘의 이범석 장군은 신선한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다 사냥으로 잡은 꿩으로 이범석 장군은 손수 만들어 빚으며 우리 가족은 그의 항일투쟁사 이야기를 들었다.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소비에트 적군과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후 독립을 되찾은 조
국으로 돌아가면서 항일독립군에게 서둘러 무기를 팔기로 작정했다.


독립투사들의 요람지인 만주 땅에서 김좌진 장군과의 눈물겨운 에피소드가 있다. 하루는 김좌진 장군이 이범석을 찾아가니 양식이 떨어져 이범석이 굶주리고 있고 전쟁터를 누비던 동반자와 같은 말이 갈비뼈가 앙상했다. 이 광경을 보고 어디로 떠났던 김좌진 장군이 다시 마차에 마른풀을 가득 싣고 되돌아 왔는데 그는 모피외투를 입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모피를 팔아 주인과 말의 양식을 구해온 것이다. 이범석의 항일 투쟁사 이야기는 40도의 강추위와 흰 눈이 덮인 몽고와 만주 벌판과 산악지대에서 펼쳐지는 대하드라마다. 청산리 전투에서 격돌한 일본정규군의 참패는 러. 일 전쟁에 승리한 불과 15년 만에 일본 기병대의 수치와 충격이었다. 요사이 일본에서 2009년부터 3년에 걸쳐 방영되고 있는 ‘언덕 위의 구름’ 대하드라마는 일본 국민작가인 시바 료타로씨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메이지 시대의 풍운아들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의 생동감 있는 필치로 일본 젊은이들에게 메이지 시대를 부활시키고 있다.

마침 일본인과 결혼한 조카가 하와이로부터 이메일로 얼마 전에 출생한 딸의 사진을 보내왔다. 성 평등과 인권을 부르짖는 변호사인 그녀는 남편성인 일본성과 한국 성을 같이 쓰고 아기 이름은 미국이름으로 지었다. 일본의 침략의 역사와 일본강점기의 항일투쟁사는 그 아이의 공동의 역사가 될 것이다. 미래는 하나의 글로벌 시대의 틀 안에서 영토와 민족 분쟁으로 국경이 다시 그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독립투사의 후예인 이 아기의 이름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연결하는 역사의 고리를 상징하지 않는가? 역사는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역동적으로 흘러간다. 광복 65주년에 태어난 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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