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누가 그를 대신 하랴

2010-08-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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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한국시간 12일 오후 7시25분께 세상을 떠난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 선생의 부음을 듣고 잠시 멍해진다. 패션쇼라는 단어가 희귀했을 시절, 나는 신문지상의 ‘앙드레 김 패션쇼’ 기사를 통해 그의 이름을 알았고 대학 졸업 후 패션 디자이너와 담당기자로 만난 인연이었다.수년 전 배우 이준기가 ‘왕의 남자’로 떴을 때 뉴욕에서 이준기 팬 사인회를 주선해 줄 수 있냐는 전화가 와서 현대뮤지엄에 장소를 알아봤던 일을 끝으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뉴욕 가면 냉면 사 들릴게요’ 하더니 앙드레 김은 뉴욕에 오지 않았고 나 역시 한국에 갈 일이 없어 몇 년 동안 잊고 있었는데 대장암과 폐암으로 오랫동안 앓으셨다니 마음이 착잡하다.

그는 한국 문화계의 보물이다. 1962년 국내 최초의 남자 패션 디자이너로 데뷔한 이래 유명 탤런트, 가수, 배우치고 그의 덕을 입지 않은 자가 없다. TV 최고인기 드라마에서 눈에 띄는 신인이 있다하면 바로 전화가 왔다. 기자가 섭외한 그 연예인은 앙드레김 스페셜 페이지에 화보 모델이 되었고 이후 한국의 간판 배우로 성장했다. 패션촬영이 있는 날은 앙드레 김 자신이 새벽부터 사간동 스튜디오나 기흥의 별장에 나와 배경 세팅은 물론 맛있는 점심 도시락까지 준비해 놓고 모델과 촬영팀을 기다렸다. 야외촬영을 할 때는 황금색과 핑크색 비단으로 탈의실을 만들어 모델에게 여왕 대접을 해주었고 잡지가 나오면 기자에게도 ‘최고의 시인’이라며 극찬을 해주었다.


한국 알리기에 앞장 선 그는 탁월한 영어실력으로 각국 대사 부인들을 화보 모델로 섭외, 촬영 날이면 직접 ‘드라이아이스’ 하고 소리치며 안개 효과를 내는 현장을 지휘하기도 했다. 노무자인 드라이아이스 맨에게도 허리 반 굽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는 인사를 극진하게 하는 그는 늘 자신의 일에 철두철미하여 주위의 감탄을 자아냈다.화려한 서양풍이지만 한국적 문양과 색감을 살린 드레스들이 모두 한국산 옷감이라든가, 옷감 살 돈이 없으면 재고품을 다시 디자인하여 새로운 감각의 드레스를 만든다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수시로 불우이웃과 장애자 돕기 패션쇼, 유니셰프 친선 패션쇼, 기타 자선 쇼를 대규모로 열며 열정적으로 사는 그에게 사람들은 몇 배의 수고비를 요구했고 그는 그때마다 아낌없이 베풀었다. 어느 날 촬영을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은행 융자서류에서 본명 ‘김봉남’을 발견하고는 ‘환타스틱 한 분이 참으로 순박한 이름을 지니셨네’ 하여 철없던 기자와 사진기자는 남몰래 웃느
라 카메라가 흔들릴 정도였다.그는 그 이름은 물론 자신이 코미디 단골소재가 되고 온갖 루머에 등장하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의 어록과 떡볶이 먹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릴 정도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던 그의 죽음에 네티즌들은 추모물결을 이루고 있다.

10년 전부터 가끔 전화를 하여 ‘뉴욕 패션쇼를 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파리, 카이로, 시드니, 파리, 북경, 상하이, 앙코르와트 등 세계 각국에서 패션쇼를 다 해도 뉴욕에서는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불발되고 말았다.환상 같고 꿈같은 앙드레김 패션왕국은 막을 내리는 건가? 양아들, 며느리가 신사동의 그 매장을 여전히 눈 속의 왕국으로 보존할 수 있을까? 감히 누가 그를 대신 하랴.20대 치기어린 시절 결혼은 사적인 일이라 일로 만난 누구에게도 청첩장을 돌리지 않았던 나는 아직 그에게 결혼 부조금을 받지 못했고 그는 내게 그렇게 고대하던 뉴욕 패션쇼 관련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 그는 75세 나이로 황황히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제 한국에 가도 만날 수가 없구나, 점차 만날 사람이 없어져가네 싶어 쓸쓸하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감에, 세월의 속절없음이 허망하기도 하다.앙드레 김 선생님, 멀리서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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