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 적정한 은퇴 시기

2010-08-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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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얼마 전 가까운 이로부터 고령의 직장인 이야기를 들었다.
공공기관인 그 직장에는 90된 노인이 아직도 정정하게 일을 하고 있는데 대신 오전에 파트타임으로 나온다고 한다. 그보다 조금 젊은 70대 중반 노인은 병원에서 키모테라피 치료를 받는 중에도 꾸준히 일을 다녀 아, 머리숱이 없어졌네, 살이 빠지셨네 할뿐 아무도 암을 앓고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몇 주전 일을 하다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후 세상을 하직했다고 한다.아마 이들은 돈 때문에 그렇게 나이 들어서까지 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일이 좋아서, 일을 잘해서 그 나이까지 일했을 것이다.공공기관인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30년 근무는 보통이라고 한다. 그곳은 평생을 한 일터에서 보내는 즉 ‘자신이 그만 둔다고 말하기 전에는 다닐 수 있는’ 말하자면 ‘철밥통’ 직장이랄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가 복잡했다.
‘혼자 살면 외로우니까 일이라도 있어 다행이네’, ‘은퇴하면 뭘 해,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움직일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몸을 놀려 돈도 벌고 운동도 되니 얼마나 좋아’, ‘놀랍다’, ‘부럽다’, ‘끔찍하다’, 이 중 어떤 반응을 해야 할 지 몰라 ‘아, 네, 그렇군요, 아,네’하고 말았다.미국은 여전히 경기가 시원하게 안풀리다 보니 대표적인 전문직이랄 수 있는 의사, 약사, 간호사, 교사도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예를 들어 6년제 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유명 제약회사에서 많게는 1만 달러까지 보너스로 먼저 주고 모셔간다는 말은 과거지사가 되어버리고 요즘 맨하탄의 종합병원에서는 약사를
덜 채용하고 원래 있던 약사를 더욱 활용한다고 한다. 어떤 40대 초반 의사는 힘들게 의사 공부를 하고도 뉴욕 인근에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일자리를 찾아 멀리 캘리포니아쪽으로 가족을 이끌고 이사 갔다.늘 모자란다던 간호사는 최근 들어 한국으로 직장을 구해 나간다는 얘기도 들리고 있다.중학교 ESL 교사인 친지는 동료가 해고되면서 두 학교를 맡고 있다. 올 초부터 개인 이메일로 컴퓨터, 사회 과목교사에게 우선적으로 해고가 통지되었다고 한다.


미국은 경기가 이리 나빠질 지 예측을 못했는지 1986년 ‘연령차별 금지법’을 개정하여 사실상 정년제도를 폐지했다. 채용, 승진, 급여 등에 나이 차별을 금지한 것이다. 현재 미국의 평균 은퇴연령은 63~65.8세이다. 하지만 2007년 금융위기이후 집값 하락, 주가 하락을 당한 노인들이 사회보장연금을 제대로 수령하려고 은퇴시기를 2~3년 늦추고 있다. 한사람이 한 직장에서 수십 년씩 있는 것은 축복이고 행운이다.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곳이 참으로 괜찮은 직장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30년, 40년, 50년씩 있으면 그뒤를 이어 봄날 죽순처럼 언 땅을 밀고 올라오는 청장년들이 설 자리가 없다. 올해 아이비 리그를 졸업해도 마음에 드는 직장을 못 찾은 젊은이도 부지기수라 한다. 물론 이 숙련노동자들이 청년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는 보고는 없다. 하지만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일을 하면 본인은 괜찮을 지라도 남 보기에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적정한 은퇴 시기는 언제일까? 다리에 힘이 있을 때 구경도 한다고 한다. 은퇴 후 평소 가고 싶던 곳에 시간과 날짜에 구애 없이 머물거나 노을 지는 강가에 앉아 살아온 인생을 좀 돌아보기도 하다가 이승을 떠나야 하지 않을까. 언제 또 이 세상에 환생할 지 모르는데, 한번 뿐인 인생 내내 일만 하다가 죽기에는 억울하지 않은가. 여생을 즐기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를 갖고 살고 싶을 때 그때가 은퇴 시기일 것이다. 그 여유는 각자의 잣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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