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대세의 어머니

2010-08-0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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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정대세, 그는 요즈음 필자의 관심을 끌고 있는 청년이다. 왜냐고?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월드컵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이었고, 기자들과의 면담에서 자유 분방한 언행을 본 까닭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는 일본에 거주하는 3세이지만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한국 국적을 가졌고,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북한 국가대표로 참가한 사실만으로도 주목받을 만한 외적인 조건을 갖췄다. 그런데 정대세의 가정 환경이나 성장 과정을 매스 미디어가 보도하면서, 필자의 관심은 그의 어머니에게 쏠리게 되었다. 그녀를 텔레비전 영상으로 본 바에 따르면, 교육관이 분명하였고, 표현이 소탈하면서 시원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한민족으로 산다면 국적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히 그녀의 교육관은 생각할 가치가 있으며, 정대세의 오늘을 가져온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왜 세 자녀를 조총련계인 조선학교에 보냈는가. 그 가족 앞에는 일본학교, 민단계 학교(전국에 네 곳뿐), 조선학교가 있었고, 한국말과 문화를 가르쳐 정체성을 기르려고 조선학교에 보냈다는 설명이었다. 해방후 외할머니가 민족학교 건립에 공이 있었고, 그녀는 결혼 전 조선학교에서 8년간 음악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다고. 우리들이 그런 환경이었다면 자녀를 위해 어느 학교를 선택하였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12년간 같은 계통의 학교에 다닌 이유는 결국 축구선수 되려고 일본대학에 전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북한 국가대표 선수가 된 것이 그리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 축구에 100% 올인한 정대세였나. ‘아니지요,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이면 곤란하지요. 피아노를 가르쳐서 잘 쳐요’ 아아, 어머니가 가르치셨겠네. ‘내가 가르치면 불필요하게 꾸짖을 것 같아 다른 분한테 붙여줬지요’ 그녀는 분명히 교육적인 생각을 하고 자녀를 가르쳐 왔다. 미국에서도 교사들이 자녀를 직접 가르치는 일을 피하고, 다른 교사에게 부탁하는 심리와 같은 것이다.


드디어 월드컵이라는 세계 무대에 선 정대세는 브라질과 첫 대결시 북한 국가가 연주되자 그예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이 자리에 왔다는 생각에 감동의 눈물이 나왔다’는 설명이었지만, 빨갱이라는 댓글이 많았다고 한다.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는 ‘초심으로 돌아가 배전의 노력을 하라’고 격려하였다. ‘오늘은 연습을 얼마나 했느냐’고 묻는 전화를 3년간 계속하여 대세가 ‘듣기 지겹다’고 반발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정대세는 감사하면서 본심을 말하였다. 어머니의 자랑거리는 따로 있다. 바로 12년간의 조선학교 초, 중급 및 고급학교 개근상장이다. 개근은 본인과 가족의 협력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12년 동안 한 번의 지각까지 없었다니 그 정신이 대단하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정대세 어머니의 교육은 인성 함양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한민족 교육을 통하여 착실하고, 끈기 있고, 목적을 세워 매진하는 사람을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꽉 막히지 않도록 음악교육으로 숨통을 터주면서.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정대세 어머니의 교육방침을 이해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 국적을 가진 부부가 이루는 가정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이런 가정들을 통일의 선발대로 본다. 통일이 되면 이런 가정이 쏟아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남한에 다문화 가정이 증가하는 것처럼. 그런데 점점 미궁에 빠지게 하는 어휘가 ‘국적’이다. ‘한민족으로 산다면, 국적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 때문이다. 교육이념은 국적과 아무 연관성이 없는가. 만일 전연 관계가 없다면, 교육 방법의 우수함은 국제인을 양성하는 것이 될 것이다. 희망적인 것은 가정과 학교의 울타리가 제아무리 높아도, 생활권의 자유로운 공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들의 거주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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