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결국은 운명인 것을

2010-07-1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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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지나고 보면 사람들에게 왔다가 떨구어 놓은 결과를 보면 모든 것이 운명이다. 그걸 우리는 팔자라고 했다. 지나고 나면 환하게 보이는 운명이 안타깝고 답답하게도 한 치 앞을 보여주지 않으니 인생의 팔자를 좋은 길로만 끌고 갈 수가 없다. 운명을 조금이라도 미리 알고 산다면 원하는 대로 팔자가 좋아질 터인데 지나고 나서야 그놈의 운명이 보란 듯이 얼굴을 들이민다. 보이지 않는 빛을 간직하고 탁자위에 앉아 있는 촛대들, 어느 날, 보이지 않던 빛이 심지에 붙어 일던, 아니던, 삶은 아름다운 핏빛 속에 천개 만개의 간절한 기도를 간직하고 이어져 가거늘, 너는 아느냐? 마지막 지점에 가서야 비로소 “아! 이것이 모두 운명이었는데 이걸 위해 나는 분주히 동분서주하며 여기까지 달려 왔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을...”

삶에는 시간이 있고, 인생에는 세월이 있다. 정상을 향해 달리는데 이 둘을 다 소비하고 나서 노쇠해진 다리를 주무르며 뛰어넘지 못한 운명을 바라본다. 그때 내고 싶은 소리가 있다면 그 소리는 우악한 소리일 뿐일 것이다. 이민은 개척이라고 했고, 개척이 아니면 이민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것도 지나고 보면 운명이고 운명이 바뀌지 않으면 이민의 내력이 숙명으로 정착하고 만다. 운명, 모두가 해보지 않았던 짐꾼 노릇을 하면서 가냘픈 어깨를 떤 이민. 시련의 상처가 나으면 백전불굴의 정신이 낳은 열매가 있을 거란 바램을 가지고 시간과 세월을 다 소비했지만 소비 끝에 남은 것은 핼쑥한 얼굴뿐이고 그 얼굴위에서 운명이 웃고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만난 사람과 한 평생을 한 지붕아래 같이 사는 것도, 한 평생을 알고 지내는 것도 운명이다.


아쉬움과 쓰라림을 남기면서 언제나 동행하는 운명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여 세상사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서로서로 모두 닮게 한다. 눈물의 색깔이 같고, 눈웃음의 모양이 같고, 그리움을 담은 눈이 같다. 그리고 소리 감춘 눈길 속에 터질 듯, 말 듯한 절규가 같다.아무리 맛이 있는 먹을거리가 있어도 씹는 노동이 없으면 맛이 나지 않듯이 아무리 좋은 미국이라도 내 삶에 맞도록 많이 단련을 시켜야 하는 고통,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뿐인 삶을 이렇게 저렇게 다 까먹고 나면 마지막으로 무엇이 남을까? 운명이다. 모든 것이 운명인 것을 그때야
깨닫는다. 수지타산을 내세울 수 없는 이승에서의 삶은 그저 꺼내 쓰기만 하는 업의 연속이었고, 그 연속의 끝은 결국 운명으로 규정을 짓고 만다.

인생은 외줄기, 그 외줄기 단음의 인생에서 어느 사람은 정치에 관심이 많아 뒷전에서 아무런 효과도 없는 정치 논란에 동분서주하고, 어떤 사람은 생활경제는 가난한데 경제철학에 관심을 쏟고, 어떤 사람은 별반 배운 것도 없는데 만물박사, 아니면 백과사전이 되어 전시하기에 열을 올린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도 모르면서 목회자가 되어 성경구절을 남발하며 먹고 살고, 어떤 사람은 염불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목탁을 두드린다.필요 없는 가지를 많이 내놓고 잔바람에도 시달리는 나무들, 그게 다 운명인 것을 어찌 하겠나.... 운명은 눈을 감지 않는데... 꿈이 절망으로 바뀌고, 행복이 불행으로 바뀌고, 기쁨이 서글픔으로 바뀌는 동서남북의 길, 어느 방향을 잡고 가더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의 길에서 그래도 사람들은 불빛을 보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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